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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Alain de Botton, Essays in Love



  알랭드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이다. 이전부터 작가의 이름은 자주 들어왔으나 책을 접한 것은 처음이었다. 독서토론의 장점이 여기에도 있는 것 같다. 평소 관심이 없었거나 잘 알지 못했던 작가의 작품들도 접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얻거나 그것을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는 점이 정말 그런 것 같다. 좋아하는 작가, 장르의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다양한 책을 접하는 것도 독서의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책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사랑'에 대한 내용이다. 저자는 주인공 '나'를 통해 사랑에 빠지는 순간부터, 가까워지는 과정, 만나게되고 사랑하게되고, 다투기도하고 화해하기도하다가 헤어지고 힘들어하고, 결국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되고... 라는 연애, 사랑의 과정을 철학적 물음과 접목시켜 도대체 사랑하는 순간마다 우리는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잘 표현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작가의 다른 책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을 정도로 좋았고, 책이 씌여진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는 느낌으로 읽었는데 생각보다 오래된 책이어서 놀라기도 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 사람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저자는 이것을 '이상화' 라고 표현하며, 그녀의 지루한 이야기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는 자체로도 충분하다. 살면서 누구나 한 두 번쯤은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될거라고 생각하는데, 필자도 이런 경험이 있는데, 그 순간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며 누가 뭐라든 들리지 않더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다.



  이상화의 과정에서 정말 무서운 것이 나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어려워하면서, 다른 사람(사랑하는 사람)은 끝도 없이 이상화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사랑에 빠진지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아서 주인공의 마음에 그녀는 이미 갈망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그녀가 보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필자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 느낌을 알고 있을 것 같다. 누군가 정말 그리워지고 보고싶고, 계속해서 '갈망' 하게 되는 느낌.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최초의 꿈틀거림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근거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다른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된 경우나, 누군가를 소개 받아서 서로 조금씩 알아가면서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



  전화기는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 같은 손에 들어가면 고문 도구가 된다. 요즘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카카오톡을 하면서 절실히 느끼게 되는 문장이었다. 그 사람과 연락을 주고 받다가, 어느 순간 읽지 않고 답장도 없고, 혹은 읽었는데 대답이 없는 경우.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게 된다. 이 사람이 왜 내 문자에 답장을 보내지 않는 걸까. 내가 싫은걸까. 나를 귀찮아하는 것은 아닐까. 바쁜 상황인걸까. 정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고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그러다가 '카톡' 알림음과 함께 답장이 도착하면 기쁨에 겨워 지금까지 했던 상상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다시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하는 경험. 물론 필자만 느낀 경험일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들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 가끔은 편지나, 2G 휴대전화의 문자메시지가 그립기도 하다. 너무 쉽게 문자로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어 전화를 하는 것도 망설여진다. 심지어 요즘은 전화번호 대신 카카오톡 아이디만 알려주는 경우도 있더라.



  저자의 표현이 너무나 사실적이고, 내가 생각만 하던 것을 문장으로 읽게되니 정말 공감도 되었고, 아 이런 감정이었구나라고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녀와 비교하면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녀가 내 초라한 입에서 떨어지는 말 가운데 몇 마디에 기꺼이 대꾸를 해주는 것도 영광인데, 하물며 나와 저녁 식사를 하기로 약속하고 또 아주 우아하게 차려입고 나왔다는 것" 주인공은 이 시기에 정말 사랑에 빠진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듯 했다. 이쯤되서는 감정이입이 되어서 정말 그녀와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읽어내려갔다.



  "침묵은 저주스러웠다.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따분한 사람은 나 자신이 되고 만다." 누군가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중에 신나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침묵이 찾아오는 때가 있다. 이 것이 길어지면 상대방은 따분해할 수 있고 지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보통 이럴 때 남녀사이에서는 남자가 대화 주제를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상대방이 반응을 보일만한 주제가 좋을 것이다. 그러자면 많은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적절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필자가 정말 못 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대화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상대방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 것 또한 일반화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단정지을 수는 없다. 때로는 다른 의견을 듣고 싶어하는 상대도 있을 것이니까. 그것을 통찰력 있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나의 진짜 자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완벽성과 화해 불가능한 갈등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무가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뒤 '나' 는 알레르기가 있는 초콜릿을 먹는 등, 상대방에 맞춰가려고 애쓰기도 한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곧 나의 모든 개인적 특징들을 버리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라는 문장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놓치고 싶지 않다면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때로는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라는 것.



  "정작 상대가 나를 사랑해줄 경우 그 사람의 매력이 순식간에 빛이 바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만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내가 바라던 대로 멋진 사람일 수 있을까?", "그/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정말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사람의 마음을 얻게되자, 그렇게 이상화하여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던 사람의 좋지 않은 점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소유하게 되자 마음이 줄어들게 된 것. 필자는 아직 여기까지는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런 것은 사람이 갖고 있는 본래의 성격?이나 본성으로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 남자, 여자에 따라 다르기도 할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일에 집중했던 것은 아마도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사랑을 하는것이 언제나 덜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며, 큐피드의 화살을 맞기보다는 쏘는 것이,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쉽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이 문장처럼 사랑을 주는 것이 더 쉽다는 것에는 공감도 되고, 수긍도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서로의 다름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다투기 시작한다. '위협적인 차이'는 중요한 점에서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취향과 의견이라는 사소한 점에서 쌓여갔다고. 하지만 이 사소한 것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더욱 중요한 점이지 않을까.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알아채는 것, 주인공 '나'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선물하는데 실패하여 창 밖으로 몸을 던지려는 시늉을 한다. 이 것이 진짜로 좌절하여 던지려던 것은 아닐거라고 생각하지만, 주인공의 성격을 짐작하면 아니라고 확언하지도 못 하겠다. 



  "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 정말 달콤한 표현이지 않을 수 없다. 읽는 동안 저절로 미소짓게 되는 부분이었다. 여기서는 정말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롭기도 하고.



  두 사람 사이에 제3의 인물이 나타난다. 그는 주인공의 친구이며 건축 설계 일을 하는 윌이라는 사람인데, 조금씩 두 사람의 관계에 금이가는 것이 느껴졌다.



  "마흔이 되면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얼굴을 가지게 된다." 조지 오웰은 그렇게 썼다. 뭔가 인상적인 말이다. 과연 나는 마흔이 되면 어떤 모습일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어떨까.



  "내가 사랑하는 것이 정말로 저 여자일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그 대상은 정말로 그 사람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책에서처럼 그저 단면적인 부분만으로 전체를 대체해버린 것은 아닐까. 한 번쯤 생각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저자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보통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틀린 생각일 수 있다는 의문.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나무를 볼 때, 그것이 시각적 착각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아내 역시도 그런 시각적 착각에 불과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것. 정말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거라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정말 이처럼 시각적 착각이라면 조금 슬퍼질 것 같다. 때로는 모르는게 약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면 적절할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닮아간다고 흔히들 말한다. 함께한 시간 만큼 서로에게 익숙해져서 말투나, 행동 등 영향을 받게 되고 말이다. 이 것들은 이별하게 되었을 때 절실히 느끼게 될 것 같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아직 나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정체성을 소유할 능력을 상실한다. 사랑 안에서 지속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본다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 우리 이름이 브래드인지 빌인지, 카르리나인지 캐서린인지 자꾸 잊어버리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다가, 마음 속에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새겨두고 있는 사람의 품에서, 시야에서 사라질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를 발견한다는 것은 위로가 되는 일이 아닐까?" 우리가 사랑을 하고,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 여운이 많이 남았다.



  저자의 표현이 참 마음에 든다.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위치에 이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녀가 하는 수 많은 말과 행동으로부터 아주 느리게 그녀의 삶의 큰 주제들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캐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알아갈 때 어쩔 수 없이 실마리들을 해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조각들을 맞추어 이야기를 엮어보는 탐정이나 고고학자와 같다. … 물론 나는 자꾸 틀렸다." 다른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알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타인을 알아갈 때 저자의 말처럼 조각들을 맞추어, 이야기를 엮어보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주인공이 자꾸 틀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쉽지 않은 일이며 이 역시 많은 대화를 통해서 유추해야 한다. 



  "우리 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데도 왜 그것이 구속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사랑의 요구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늘 갈망의 요구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의 요구와 다른 사람을 또 다시 갈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서, 아니 우리나라의 정서에는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을 갈망하는 것은 비도덕적 행동으로 비난받을 일이다. 기본적으로 문화의 차이이며 역사 속에서 계속 이어져온 전통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저자는 이와같은 갈망의 요구를 사랑의 욕구와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면 어쩌면 타인에게 또 다시 끌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클로이가 나를 사랑한다는 기적을 심드렁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녀는 내 삶의 일상적인,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특징이 되어버렸다." 짧은 문장이지만, 뭐랄까 깊이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다. 익숙함이라는 것은 좋은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이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익숙해지면서 초기의 가슴 설레는 느낌은 줄어들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 만큼 친해졌다는, 내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편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사랑을 한다고 언제나 처음 그대로의 감정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서 '사랑'의 익숙해졌다는 이유로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라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닌 것이라고 여길 수 있기 때문에, 권태를 느끼게 되고 그 시점에서 이별을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일단 한쪽이 관심을 잃기 시작하면, 다른 한쪽에서 그 과정을 막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여기에서는 저자의 말 외에 덧붙일 말이 따로 없을 것 같다. 사랑은 혼자서 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다.



  "삐친 사람은 복잡한 존재로서, 아주 깊은 양면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도움과 관심을 달라고 울지만, 막상 그것을 주면 거부해버린다. 말없이 이해받기를 원한다." 삐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 답은 간단하다. 이해해 주는 것. 



  이래서 사랑이 어려운가보다. 책 내용처럼,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말한다.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너한테 삐치거나 질투심을 일으켜서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역설이 생긴다. 상대가 사랑으로 보답한다면, 그 즉시 그 사랑이 더럽혀진 것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강요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사랑은 자발적으로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연인 사이의 밀고 당기기가 필요한 것으로 보이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한쪽이 관심을 잃기 시작하면 다른 한쪽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결국 주인공의 그녀는 그를 배반한다.



  슬픈 대목이지만 우습기도하다. 여자가 남자를 배반함으로 해서 생긴 고통을 놓고 배반당한 남자가 배반한 여자를 위로하고 있는 상황이라니. 오히려 이 부분에서 울어야하는 사람은 남자일테지만. 



  "사람이란 그 기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선과 악의 일반적 구별에서도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선과 악은 사람에 따라 다르며 나에게 선한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는 악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언제나 역지사지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나' 는 이별의 아픔에 무너져내린다.



  '자살'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인간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며, 그 바람에 자살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되었다." 죽고 싶은 마음 밖에 들지 않았을 정도로 이별의 아픔은 컸나 보다. 여기에서는 주인공이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거라고, 정말 자살함으로써 이야기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죽게 되면 그가 죽음으로서 그녀가 죄책감에 슬퍼할 모습을 볼 수 없게 되므로 삶을 선택한다. 죽음은 결코 삶의 연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행동의 결과를 지켜볼 수 있는 일종의 내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은 죽게 되면 나의 소멸이라는 멜로드라마로부터 어떤 기쁨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행동일 터였다."



  "그러다가, 불가피하게, 나는 잊기 시작했다." 죽을 것만 같던 시간도 결국 지나가는 것일까. 이런 격언이 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지나고 나면 지금의 고통은 좋은 경험, 술 안주거리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 "이제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녀의 부재가 아니라, 내가 그녀의 부재에 무관심해진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새로운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다. 이렇게 다시 처음의 감정부터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 '클로이'와의 사랑에서 얻은 교훈으로 더 나은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책 마지막 부분의 해설인데, 필자가 느끼지 못했던 부분을 잘 짚어주어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저자가 지금의 내 나이와 같은 때에 이런 글을 썼다는 사실인데, 글을 잘 쓴다는 사실이 부러웠고 이와 같은 글을 썼다는 것은 그만한 경험이 있었다는 뜻일텐데, 그것 역시 부러웠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으로 글을 마친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 Alain de Botton, Essays in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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