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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다소 거창한 제목을 갖고 있다고 느낀 책이었다. 같은 제목으로 책이 여러가지가 있던데, 내가 찾은 책은 쉽게 읽을 수 있는 3가지 이야기만을 다룬 책이었다. 톨스토이의 단편집 모음인가보다. 어쨌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춰 읽어보았다. 답은 결론에서 다루도록 하자. 책의 구성은 3가지 이야기, 첫 번째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두 번째는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세 번째는 바보 이반에 관한 이야기로 마치 동화같은 이야기로 삶에 중요한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간략한 줄거리는 가난한 구두장이가 힘들게 살아가다가 우연히 교회 앞에 쓰러진 청년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먹여주고 재워준다. 구두장이의 아내는 그 청년이 처음에는 못마땅하였으나 이내 음식을 대접하며 남편을 이해하려 한다. 그리고 청년은 그대로 구두장이의 집에 눌러살면서 일을 돕게 된다. 그러던 중 어느 부유한 신사의 구두를 만들게 되는데 그동안 실수 한 번 하지 않던 청년이 신사의 구두를 슬리퍼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구두장이는 신사가 신신당부한대로 감옥에 가게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했으나 신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의뢰한 구두 대신 슬리퍼가 필요하게 되었고 청년의 행동은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고 어느 여인이 찾아와 두 여자아이의 구두를 주문하는데 청년은 사실 천사였고 하느님의 지시로 그 두 여자아이의 원래 어머니의 목숨을 거두는 일을 하러 왔다가 그만 인간 세상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세 가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 때문에 웃게 되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처음에는 못마땅하게 생각하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청년을 대접했던, 자신들도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청년에게 음식을 대접한 자비심,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신사가 자신의 죽음을 모르는채, 행동하는 모습에서 인간에게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에서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위해 없어서는 안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지혜' 가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과 세 번째로 자신이 영혼을 거둔 어머니의 쌍둥이 아이가 버려진 것은 아닐까 걱정하였는데, 좋은 사람을 만나 건강하게 자랐다는 것을 보고는 마지막으로 웃게 되었고 마침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죄를 용서 받고 하늘로 돌아가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대목은... 이야기의 제목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에서 '무엇' 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는데, 이야기의 교훈에서 생각해본다면 결국 사람은 '사랑' 이라는 힘에 의해 살아간다고 말해주고 있다. 사실 필자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는 '사랑' 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가족간의 사랑, 연인간의 사랑, 아니면 어떠한 물건이나 장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람은 혼자 살아가지 않는다. 끊임없이 타인과 만나고 이야기하고 소통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랑이라는 어찌보면 너무 추상적인 단어일지도 모르나, 이것이 없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모든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과연 살만한 세상인걸까. 사랑이 없는 현실은 상상하기 어렵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를 한 번 살펴보자.


사랑01
명사
「1」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2」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
「3」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4」열렬히 좋아하는 상대.
< <두시-초>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사랑을 명사로서 주로 '마음' 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4가지 이야기이지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누군가 자꾸 생각나고 그립고 보고싶고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고, 두 번째는 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 즉 자신보다 더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동정의 마음이라던지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려는 것, 또 사람이 아닐수 있는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단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에서 나타난 '사랑'의 의미는 두 번째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구두장이가 자신도 어려운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청년을 집으로 데려온 것, 아내 역시 처음에는 불만가득한 태도를 보였으나 이내 그를 딱히 여겨 식사를 대접하고 집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는 점이 역시 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의 사랑의 모습이다. 또한 비록 사람이 아니라 천사인 미하엘이 하느님의 절대적인 명령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딱한 처지의 여인의 목숨을 거두지 못한 점 역시 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

  미하엘은 하늘로 돌아가면서 말한다. "나는 모든 인간들이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살아간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종교는 믿지 않지만 이 책에서 사랑이라는 가치에 대해서 다룬 내용은 정말 가치 있는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는가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외로움을 느낄때 주위를 둘러보자. 분명 누군가 곁에 있을 것이다. 혹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느낄때는, 나부터 남에게 사랑을 주고 있는가를(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 생각해보고 먼저 실천해보면 어떨까. 우리 모두는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니까.



  다음의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이다. 그 내용은 간단하다. 어떤 농부가 자신은 도시생활에 비해서결코 부러울 것이 없으며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땅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리고 만약 땅만 원없이 있다면 악마라도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 친다. 그것을 들은 악마는 그 농부를 땅으로서 골탕먹이려는 계획을 세운다. 농부는 계속해서 큰 땅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행인이 찾아와 멀지 않은 곳에 더 좋고 넓은 땅이 헐값이라며 농부를 유혹한다. 농부는 모든 것을 팔고 더 좋고 넓은 땅을 찾아 떠나다 결국 어떤 마을에 다다르는데, 그곳에서는 해가지기전까지 자신이 걸어갔다가 돌아온 모든 땅을 갖게 해준다고 이야기한다. 농부는 조금이라도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신발도 벗어버리고 최대한 멀리 걸어간다. 하지만 해가지기전에 돌아오는데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그 욕심을 결국 농부의 목숨까지 앗아간다. 땅을 더 많이 얻기 위한 욕심으로 체력적으로 너무 무리한 나머지 목숨마저 잃는다. 결국 농부가 얻게된 땅은 자신이 묻히게된 아주 작은 땅이었을 뿐이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일까. 흔히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사람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 라는 격언이 딱 맞는 말인 것 같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리고 그것만을 좇다보면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교훈이다. 땅에 대해서도 뭔가 이야기하고 싶다. 땅이라는 것이 정말 사람의 소유일까. 사람들은 땅을 소유할 자격이 있을까. 사람이 땅을 소유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역사적으로 과거 구석기, 신석기를 거쳐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가 아닐까 싶은데, 무리가 한 곳에 정착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너무 두서없는 이야기가 되었는데,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라는 주제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결국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죽어 묻히게될 아주 작은 땅만 있으면 되지 않는가라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해본다. 농부가 처음에 자신이 갖고 있던 땅에 만족하며 욕심내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비극적인 죽음을 맞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생각을 해보자. 요즘에는 땅 한평 갖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사실 돈 많은 몇몇 사람들에 의해 대다수의 땅은 그들의 소유가 되었고, 땅은 고사하고 평생을 일해도 내 집 하나 장만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한 현실이다. 이런 사회구조는 과연 옳은 것일까. 지금 사회체제 민주자본주의는 겉으로는 각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능력에 의해 인정받으며 얼마든지 신분상승이 가능하다라고 하는 이야기이지만, 실제로는 그와 같은 이야기는 이제는 거의 신화나 전설과 같은 것이 되어가는 것 같다. 가진 사람들은 더욱 잘 살아가고 어려운 사람들은 더 나아지기는 커녕 더 악화되어만 가는 경우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어떻게 변해야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구조에 순응하며 나름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들을 비난하기는 힘들다. 모두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결론 내리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어느나라의 농부가 살았는데, 그 농부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시몬은 군인이었고, 둘째아들 타라스는 장사꾼 이었으며, 셋째아들 이반은 농사꾼이었는데, 흔히 말하는 '바보'였다. 큰 아들과 둘째아들은 돈만 밝히는 작자였지만, 이반 때문에 셋은 의좋게 지낼 수 있었다. 이것을 시기한 늙은 악마가, 세 마리의 악마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반 형제들을 싸우게 만들라고 말이다. 그래서 각각 악마들은 형제 한명 씩을 맡아 요술을 부려 형제들을 불행하게 만드는데, 하지만 이반을 맡은 악마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반을 괴롭히지 못하고 도리어 악마가 이반에게 들키게 된다. 이반은 악마를 죽이려 하지만, 악마에게서 약초를 받는 조건으로  그냥 풀어주었다. 그래서 나머지 악마들이 이반을 다시 공격하려 하지만, 역시 이반에게 걸려들었고 각각 악마들은 이반에게 도움이 되는 요술을 알려주고 풀려났다. 그 요술을 이반이 형에게 가르쳐주어 형들은 모두 부자가 되고 그 돈과 권력으로 왕이된다.

  이반은 돈에는 도통관심이 없었는데, 마침 나라의 공주가 병에 걸리자 예전에 악마에게서 받았던 약초를 바쳐 공주가 낫게되었다. 그래서 이반은 공주와 결혼하고 나라의 왕이되었다. 이 사실을 안 늙은 악마는 정말 화가나고, 각각 이반의 형들을 망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반에게는 백성들이 망하도록 계획을 세웠지만, 이반은 바보가 아닌가, 그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이반을 닮게 되어 늙은 악마의 술수가 통하지 않는것이다. 결국 늙은 악마는 그렇게 이반의 나라를 망하게 하기위해 계교만 생각하다 그만 죽고말았다



출처: 네이버 지식IN 까망콩장(2001tpdus)님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3&dirId=307&docId=140618290&qb=67CU67O07J2067CYIOykhOqxsOumrA==&enc=utf8§ion=kin&rank=3&search_sort=0&spq=0&sp=1&pid=RN%203NF5Y7tNsstKp6odsssssstR-129154&sid=Uc%403cnJvLBcAABMpEyw



  마지막 이야기는 '바보 이반' 이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바보 이반은 말 그대로 바보이기 때문에, 탐욕적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묵묵히 해내며 살아간다. 형들이 그의 몫의 재산을 가로채도, 형들이 하던 일이 망하여 찾아와서도 따뜻하게 감싸주고, 좋은 것이 생기면 가족과 나누는 등, 바보라고 표현되었긴 하지만 너무도 착한 인간상을 그리고 있다. 



 도깨비는 바보들에게 일을 하지 않고도 돈을 벌고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하지만,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바보들은 바보였기 때문에 당연히 무슨 말인지도 몰랐으며, 그에게 먹을 것을 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도깨비가 돈을 준다고 해도 바보인 이반에게는 그저 필요 없는 것일 뿐이었다. 



  글쎄,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넘치는 부나 명예와 같은 것보다 근면, 성실, 선한 것들이 중요하다라는 것을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각 형제들과 악마가 상징하는 것들이 훨씬 깊은 내용일 것임에는 틀림없다. 아마 당대 사회를 풍자하고 다소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로 씌여진 이야기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야기에서 등장한 이반의 형들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일까?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반처럼 성실하게 살아가다보면 저러한 보상과 멋진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걸까? 지금 우리의 현실에도 적용 가능한 이야기일까? 이 이야기들은 어린아이들도 읽는 동화에 수록되어 있는데 아이들은 이것들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냥 단순한 동화라고 보기에는 내가 너무 자랐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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