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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규장전>




개성 낙타교 밑에 이생이라는 십팔 세의 총각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얼굴이 말쑥하며 재주가 비범하고 배움에 뜻을 두어 일찍 국학에 다닐 때 길 가에서도 글을 부지런히 외우곤 했다. 마침 선죽교에 살고 있는 귀족 집 처녀 최랑은 나이 십륙 세 쯤 되었으니 태도가 아릿답고 수놓는 일도 잘하고 시문에도 능통하였다. 동리 사람들은 시를 지어 둘을 찬미하였다.

풍류로울손 이총각! 아릿다워라 최처녀.

그 재주 그 얼굴을 뉘라서 아니 찬탄하리.

이생이 책을 옆에 끼고 학교에 갈 때는 반드시 최랑의 집 북쪽 담 밖으로 지나게 되었다. 축 늘어진 수양버들은 그 담을 에워싸고 있었다.

어느 날 이생은 나무 그늘에 쉬다가 우연히 그 담 안을 넘겨다 보았더니 이름난 꽃은 봄을 한창 맞이하여 만발하였는데 벌과 새들은 고운 노래를 부르고 그 곁 꽃나무 사이에는 작은 다락이 하나 은은히 뵈었다. 구슬 발은 반 쯤 가리웠고 비단 장은 낮게 드리웠는데 한 아릿다운 아가씨가 수를 놓다가 곤함을 이기지 못하여 바늘을 잠간 멈추며 턱을 괴고 시를 두 수를 읊조렸다.

 

사창에 홀로 기대 수놓기도 귀찮은 때,

한창 핀 꽃밭 속에 노란 꾀꼬리 지저귀네.

무단히 봄바람을 원망도 해보지만,

가만히 바늘 멈춰 생각에 잠겨보네.

 

길가는 저 총각은 어느 집 도령인가?

푸른 도포 긴 소매가 수양버들에 비추이나.

언제나 마당 가에 날고 있는 저 제비 되려나,

나직히 주렴 차고 나가 올라 담장을 솟구치리.

 

이생은 그의 읊은 시를 듣고 마음니 근질 근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담은 높고 마당은 깊숙하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느날 이생은 학교에서 돌아오다 한 계교를 생각하여 흰 종이 한 폭에다 시 세 수를 써서 기와 쪽에 매어 담 안으로 던져 넣었다.

 

무산 열 두 봉우리에 안개만 자욱하니,

반쯤 보인 꼭대기에는 푸른 빛만 보이나다.

양왕의 님그리는 정을 물리치지 마옵시고,

운우되어 양대로 내려옴이 어떨지.

 

상여가 탁문군을 꾀고자 했지만,

문군의 마음도 이미 만만치 않았도다.

담장 너머 곱게 핀 도리화 꽃송이는

바람 불면 어지럽게 어느 곳에 떨어지리.

 

좋은 인연인가. 나쁜 인연인가?

부질없는 님생각에 세월만 보내다가,

7언시 한 수로 가약 이미 맺었거니,

어느 날이더냐? 남교에서 신선을 만날 날이.

 

최랑이 깜짝 놀라 시녀 향아를 시켜 그것을 주어보니 곧 이생이 보낸 시였다. 최랑은 그 시를 거듭 음미한 뒤 홀로 기뻐하며 종이 조각에 여덟 자를 써서 담 밖으로 던져 주었다.

 

당신만 괴찮으시다면, 오늘 저녁에 약속하셔요.

 

이생은 그 말대로 저녁이 되자, 최랑의 집을 찾아갔다. 별안간 복숭아꽃 한 가지가 담 위로 휘어져 내려 하늘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이생이 자세히 살펴보니 그넷줄에 깔판을 매어서 드리워진 것이었다. 이생은 곧 그 줄을 타고 담을 넘게 되었다. 마침 동산에 달이 떠오르고 꽃 가지는 땅에 비스듬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생은 기쁜 한 편으로 들킬까봐 염려되어 모발이 송긋해질 지경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다가 최랑을 찾았다.

최랑은 꽃떨기 깊숙한 곳에 파묻쳐 앉아 향아와 꽃을 꺾어 머리 위에 꽂다가 이생을 보고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시 두 귀를 읊었다.

 

복숭아 가지 속에 꽃빛은 부귀롭지만,

원앙 베게 위에 달빛은 너무나 아름다워요.

 

이생은 뒤를 이어 읊었다.

 

다른 날 봄소식이 누설이나 될지면,

비바람 무정하여 가련한 신세되리라.

 

최랑은 곧 낯 빛을 변하면서 말하였다.

제 본디 당신과 함께 끝까지 부부되어 영원의 행복을 누리려 하였거늘 당신은 어찌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시나요? 저는 비록 여자의 몸이오나 이에 대하여 마음이 태연하거든 하물며 대장부의 의기로 이런 염려까지 하시나요? 이 뒤에 만일 규중의 비밀이 누설되어 부모님께 꾸지람을 듣는다 해도 제가 단독으로 책임 지겠나이다.”

향아에게 방에 들어가서 주과를 갖추어 가지고 오게 하였다. 향아는 명을 받고 가버렸다. 온 집안이 고요하여 인기척이 없어짐에 이생은 최랑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요?”

. 뒷 동산 작은 다락 밑이예요. 저의 부모님께서 무남독녀인 제게 유달리 귀염을 주셔서 따로 연못 가운데 이 집을 지어 두시고 봄이 되어 온갖 꽃이 만발할 때는 향아와 함께 즐겁게 놀게한 곳이예요. 부모님 계신 곳은 여기와 가깝지 않아 크게 웃더라도 들리지는 않을 것이예요.”

최랑은 술 한 잔을 부어 이생에게 권하면서 시 한 편을 읊었다.

 

부용 못 깊은 위에 솟은 난간 굽어 보고

꽃다발 그 사이엔 누구들이 속삭이나.

향기론 안개 피고 봄 빛은 화창할 제,

새 곡조 지으려니 백저사를 부르누나.

꽃 그늘에 달 비끼고 털방석을 페었는 듯,

긴 가지나 잡고 보라 붉은 빗 발 내리도다.

바람은 향내 끌고 향내는 옷 깃에,

첫 봄을 맞이할손 아가씨 춤만 춘다.

가벼운 소매로서 해당화 스쳐 볼까?

꽃 밑에 졸고 있던 앵무새만 깨웠구나.

 

이생은 서슴치 않고 곧바로 화답하였다.

 

시선을 그릇 찾아 무릉도원 예 왔고나.

구름같은 쪽찔머리 금비녀채 나직할손

엷고 엷은 초록 적삼 봄 철이라 새로 지어

빗 바람 부지마소 나란히 핀 이 꽃들에

선녀가 내리신다 소맷 자락 살랑살랑

기쁨을 다할소냐 시름 거듭 엿보리라.

함부로 새 곡조로 앵무새를 가르치랴.

 

주연이 끝나자, 최랑은 이생에게 말했다.

오늘 일은 반드시 작은 인연이 아니오니 당신은 저를 따라 백년의 기쁨을 이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최랑은 곧 북쪽 들창 속으로 들어갔다. 이생은 그 뒤를 따라 사닥다리를 타고 오르니 한 작은 다락이 나타났다. 문방사우와 책상들이 매우 말쑥하고 한 쪽 벽에는 연강첩장도와 유황고목도 두 폭을 붙였는데 모두 명화였고 그 위에는 각각 시가 한 편씩 적혀 있었으나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첫째 그림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저 강 위의 첩첩 산을 어느 님이 그렸던고.

구름 속 방호산은 반 봉우리 뵐락 말락.

아득한 몇 백 리에 형세도 장할시고,

소곳소곳 쪽찔머리 다락 앞에 벌어있네.

가없는 푸른 물결 저 공중에 닿았구나.

저문 날 바라노니 고향 산천 어디매오?

이 그림 구경할 제 님의 느낌 어떻더니,

소상강 빗 바람에 배 띄운 듯 하여라.

 

둘째 그림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바삭바삭 댓 닢에는 가을 소리 들리난 듯

굼틀굼틀 고목에도 옛 뜻을 품은 듯이

뿌리 깊어 이끼 끼고 가지마다 활짝 뻗어

무궁한 조화 자취 가슴 속에 간직했네.

미묘한 이 지경을 뉘와서 말할소냐.

위언 여가 떠난 뒤에 이 묘리를 뉘 아리.

개인 창 그윽한 곳 말없이 바라 보니

신기할손 님의 필법 못내 사랑하고파라.

 

한쪽 벽에는 사시경 각각 네 수를 붙였는데, 또한 어떤 사람이 지은 시인지 알 수 없었고 글씨는 조송설의 것을 본받아 자체가 매우 곱고 단정해 보였다.

그 첫 폭은 이렇다.

 

부용장 속 숨은 향내 실바람에 나부끼고,

창 밖엔 붉은 행화 비 내리 듯 하는구나.

오경이라 종 소리에 남은 꿈을 깨고 보니,

신이화 깊은 곳에 백설조타 우거진다.

 

기나긴 날 깊은 도장 제비 쌍쌍 모여 들 제,

귀찮을사 말도 없이 금바늘을 멈추노라.

다정한 저 나비는 님의 동산 쌍을 지어,

낙화를 사랑터냐 펄펄 날다 앉으리무나.

 

얇은 추위 살랑 살랑 초록 치마 스쳐올 제,

무정한 봄 소식은 남의 애를 끊나니.

말없는 이내 뜻을 뉘라서 알아주리,

온갖 꽃 만발할 제 원앙새만 춤을 추네.

 

봄 빛은 깊고 깊어 뉘 집 동산 간직했나

붉으락 푸르락 비단 창 앞 비치누나.

방초라 우거진 곳에 외로운 시름 위로할 제.

수정 발 높이 걷곤 지는 꽃을 헤어보렴.

 

그 둘째 폭은 이렇다.

밑 대엔 알 첨 배고 어린 제비 날 제에

남쪽 뜰 석류화는 나란히도 피었도다.

푸른 들창 홀로 비겨 길삼하는 저 아가씨

붉은 비단 베어 내어 새 치마를 마르련다.

 

매실은 익어갈 제 가는 비는 보실 보실,

꾀꼬리 울고나서 제비조차 드날릴 제

이 봄은 간데 없어 풍경조차 늦을시고,

나릿꽃 떨어질 쩨 새 죽순이 뾰쪽 뾰족.

 

살굿 가지 후려 잡아 꾀꼬리나 갈려 볼까.

남헌 속에 바람 일고 쬐는 햇발 더디어라.

연 닢에 향내 뜨고 푸른 못 가득한데,

저 물결 깊은 곳에 더펄새가 목욕하네.

 

푸른 등 대방석에 물결처럼 목욕하네.

소상강 그린 병풍 한 봉우리 구름인가.

낮 꿈을 깨련마는 고달픈 채 그냥 누워,

반장에 비낀 햇발 기웃기웃 하는고나.

 

그 셋째 폭은 이렇다.

쌀쌀한 가을 바람 차디찬 이슬 맺고

달 빛도 고웁다만 물결은 파랗고나.

기러기 돌아 갈 제 한 소리에 또 한 소리,

다시금 들으련다 금정 오정 지는 닢을,

 

상 밑에 우는 벌레 소리 소리 처량하다.

상 위에 아가씨는 눈물 겨워 하는구나.

머나먼 싸움 터에 몸을 던진 님이시여.

옥문관 오늘 저녁 달 빛 응당 희디희리.

 

새옷을 마르려니 가위조차 서늘하다.

나즉히 아이 불러 다리미를 갖고 오니,

불 꺼진 다리미라 쓸 곳이 없네그려.

가만히 피릿대로 꺼진 재를 헤쳐보네.

 

연 꽃은 다 피었나 파초닢도 누렇구나.

원앙 그린 기와 위엔 새 서리가 흐뭇 젖어

새 원한 묵은 시름 애닲은들 어이하리,

골깊은 방에는 뀌뚜라미 우짓는데.

 

그 넷째 폭은 이렇다.

한 가지 매화일사 온 창을 가렸구나.

서랑에 바람 급고 달 빛 더욱 명랑하다.

화로 불 헤쳐도 녹아지지 않았더니,

아이야 예 오너라 차좀 닳여 보자구나.

 

밤 서리에 놀란 닢은 자주 자주 퍼덕이고

돌개바람 눈을 불어 골방으로 들어올 제.

속절없이 꿈이더냐 그리웁던 님 생각에

빙하가 어디런고 머나먼 옛 전쟁터

 

창 앞에 붉은 해는 봄 빛인양 따뜻하고

근심에 잠긴 눈섭 졸음조차 덧붙이네.

병에 꽂힌 작은 매화 필락 말락 하건마는

수줍은 채 말도 없이 원앙새만 수 놓나니.

 

쌀쌀한 서릿 바람 북쪽 숲을 스치려니

처량한 찬 가마귀 달을 맞아 우지진다.

가물가물 등불 앞에 실꿰기도 어려워라.

님 생각에 솟은 눈물 바늘 귀에 떨어지네.

 

한 쪽에 또 별당 한 채가 있는데 매우 깨끗하였고 온 방안에서는 사향 향내가 풍겼고 촛불은 백주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 있었다. 이생은 최랑과 즐기면서 몇 일동안 계속 머물렀다.

어느날 이생은 최랑에게 말했다.

옛 성인의 말씀에 [부모님 계시오면 나가 놀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방향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제 내 부모님을 떠난 지 사흘이 지난지라 부모님께서 응당 문을 비켜 서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니 어찌 인자의 도리라 하겠소.”

최랑은 돌아가도록 응락해 주었다. 이 뒤로부터 이생은 저녁마다 최랑과 만나지 않을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저녁에 이생의 아버지는 이생에게 꾸지람을 내렸다.

네가 아침에 집을 나가 저물어 돌아옴은 옛 성인의 참된 말씀을 배우려 함이라. 이제 황혼에 나가서 새벽에 돌아오니 이게 왠 일이냐. 아마 부랑한 아이들과 어울러 다니면서 남의 집 담장을 넘어들겠지. 이런 일이 만일 탄로나면 남들은 모두 내 자식 가르침이 엄하지 못해 그렇다고 책망할 것이요, 그 집 처녀도 양반집 따님이라면 네 때문에 집안 문호까지 더럽히게 될 것이니 남의 집에 죄악을 지음이 적지 않을 게다. 빨리 영남 전장으로 내려가 일꾼들이나 감독하고 내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절대로 올라올 생각하지 말거라.”

이생은 다음 날로 울주로 보내지게 되었다.

최랑은 저녁마다 화원에서 이생을 기다렸으나 수 개월이 넘어도 그림자도 뵈지 않았다. 혹 그가 병이나 나지 않았나 생각하고 향아를 시켜 가만히 이생의 이웃에게 물어오도록 하였더니, 이웃사람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이구! 이도령은 그 부모님께 죄를 얻어 영남으로 내려간 지도 어언 수 개월이나 되었다오.”

이 소식을 접한 최랑은 어이없어 침상 위에 쓸어져 일어나지 못하였다.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은 채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만 해대며 얼굴은 점차 초라해져 갔다. 그 부모는 놀라서 이유를 물어 보았으나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루는 슬며시 옆에 있는 대바구니를 들추다가 딸이 이생과 함께 주고받은 시를 읽어보고는 그제서야 무릎을 치면서 더욱 놀라 말했다.

내가 잘 못하였더라면 귀한 딸만 잃을뻔 했구나!”

그리고는 딸에게 물었다.

애야! 이생이 누구냐? 모든 것을 내게 솔직히 말해라1”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최랑은 다시금 숨기지 못하고 겨우 나는 목소리로 나직히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은덕이 깊으신 부모님께 어찌 숨기겠습니까? 다름이 아니오라, 남녀간의 애정이란 인간으로서 소홀히 여기지 못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옛 글에도 이에 대한 찬미와 경계의 말씀이 한가지 뿐만 아니었습니다. 저같이 갸냘픈 여자의 몸으로 남은 일을 염려치 않고 이런 과오를 범하게 되어 방탕한 행실이 더욱 나타나 남들에게 웃음을 입게 되었사오니 죄가 이미 넉넉하고 수치는 부모님께 미칠 것이오나 이생을 한 번 여윈 뒤로 원한이 쌓여 쓰러지게 된 약한 몸이 맥없이 홀로 있어 생각이 날로 깊고 병세는 점차 위중하여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사오니 부모님께서는 제 소원을 이룩하게 하여 주신다면 남은 목숨을 보전할 것이옵고 그렇지 않으면 비록 죽은 뒤라도 이생을 지하에서 따를지언정 맹세코 다른 가문에는 시집가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 부모는 이미 그 뜻을 짐작하고 더 이상 병세를 묻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좋은 말로 딸애를 달래며 마음을 눅히고 한편으로는 매파를 이씨 집안에 보내었다.

이씨는 먼저 최씨 문벌을 묻고는 말했다.

우리 아이가 비록 어린 나이에 바람이 나 쏘다녀도 학문에 정통하고 외모가 유다르니 장래에 과거에 합격하여 이름을 세상에 날릴 인물이오. 그러니 속히 서둘러 혼사를 구하지는 않겠소.”

매파는 곧 돌아와 이 말을 최씨에게 고했다. 최씨는 다시금 매파를 이씨에게 보냈다.

일시 여론에 의하면 귀댁 도령님의 재주는 보통이 아니라 하오니 지금 비록 뜻을 펴지 못했으나 어찌 곧 현달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날을 정하여 빨리 둘을 혼인시키는 것이 좋을 듯한데 어떻겠습니까?”

매파가 또 돌아가서 그대로 이생의 아버지에게 고했더니 말했다.

나도 젊어서 책을 끼고 다니며 글깨나 읽었지만, 나이들어 이루어 놓은 것이라고는 없고, 노복들은 붙잡아 놓아도 달아나고 친척들 도움도 적어서 살기가 적적할 뿐아니라 가계는 참으로 말이 아니라오. 한데 그렇듯 큰 집안에서 우리같은 한미한 집안애를 뭐 볼게 있다고 데릴사위로 삼겠소. 이는 만드시 일꾸미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우리 집안을 지나치게 자랑하여 귀댁을 속인 것일게외다.”

매파가 또 최씨 집안에 고했더니 최씨가 말했다.

모든 예물과 의장은 저희 쪽에서 모두 담당할 것이오니 다만 좋은 날짜를 가려 화촉의 예를 치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매파가 또 돌아가 고했더니, 이씨집에서 그제서야 마음을 조금 바꾸었다. 즉시 사람을 보내어 이생을 불러올려 물어보았더니, 이생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시를 한 편 지었다.

 

깨친 종이 다시 둥글다니 이것 또한 인연이라.

은하수 오작도 이 가약 도우노라.

이번에 월로노인이 묶어가버린 뒤론,

다시는 동풍을 향해 자규를 원망하지 않으리.

 

최랑이 이 소리를 듣고 그럭저럭 병도 나을 즈음에 시를 한 편 지었다.

 

악인연이 호인연이던가?

맹세의 그 말씀 결국 이뤄졌도다.

님과 함께 가마 끌 날 언제이런가.

아이야 날 일으켜라 꽃비녀 다듬게.

 

이에 길일을 가려 혼례를 이루었다. 이로부터 둘의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공경하여 옛날 양홍맹광 부부나 포숙아제환공 사이라도 그들의 절개를 따를 수 없었다. 이생은 이듬해 대과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니 그의 이름이 온 조정에 소문이 나 있었다.

신축년에 홍건적이 서울을 쳐들어 왔다. 임금은 복주로 옮겨가시고 놈들은 집건물을 불사르고 사람이며 가축들을 닥치는 대로 찔러 죽였다. 이생부부와 친척들도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이생은 가족과 함께 산골에 숨었더니 한 도적이 칼을 가지고 뒤를 따르는지라 그는 도망하여 죽음을 겨우 면하였으나 최랑은 도적에게 붙잡혀 급탈을 당할 처지였다. 최랑은 크게 소리쳤다.

창귀놈아! 나를 잡아 먹어라. 차라리 죽어서 호랑이 밥이 될지언정 어찌 너같은 개돼지의 배필이 되겠냐?”

도적은 화가 나서 뼈까지 발라 죽여버렸다.

이생은 온 들판을 헤매다가 도적이 이미 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을 찾으니 자기 집은 이미 병화로 불타 없어졌다. 다시 최랑 집에 가 보았더니 쓸쓸한 집 주위에는 회랑만이 황량히 남아 있었다. 여기저기 쥐가 찍찍거리며 다니고 무정한 새들이 지저귈 뿐이었다. 이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작은 다락 위에 올라 눈물을 닦으며 길게 한숨 쉬었다. 어느듯 해는 저물었고 우두커니 혼자 앉아 지난 날 노닐던 일들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완연히 꿈만 같았다. 한 밤중에 거의 이르자, 달빛은 희미하게 들보에 비추는데 낭하로부터 발자국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멀리서 점점 가까이 다다르더니 최랑이 나타났다. 이생은 비록 이미 죽었음을 알고 있었으나 사랑이 너무도 도타왔던지라 더 이상 의아해 하지 않고 그냥 물어 보았다.

당신은 어디서 피란하여 생명을 보전하였소?”

최랑이 이생의 손을 잡고 통곡하였다.

저는 본디 양반집 딸로 어릴 때 집안의 가르침을 받아 수놓고 침선뜨는 일에 힘썼고 시서와 예의를 배워 다만 규중의 예법만 알고 그 밖의 일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마침 당신께서 복숭아 핀 담 위를 엿볼 때 저는 스스로 벽해의 구슬을 드려 꽃밭에서 한 번 웃고 평생의 가약을 맺었삽고 깊은 휘장 속에서 거듭 만날 적에는 이미 정이 백년에 넘쳤드랬습니다. 여기에 말이 이를 즈음, 슬프고 부끄러운 마음을 어찌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장차 백년 해로하며 살기을 바랬더니 불의의 횡액을 만나 마침내 짐승같은 놈에게 몸을 허락하지는 않았으나 육체는 사막에 갈기갈기 찢기어졌사옵니다. 이는 천성으로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이지 인정으로는 차마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궁벽한 낭떨어지에서 한번 이별을 하는 것을 아쉬워하다가 결국에는 영원히 이별할 수 밖에 없는 한 마리 새처럼 되었답니다. 집안 친척들은 이제 다 돌아가시어 슬프게도 혼백마저 의지할 때가 없지만, 의리를 중히 여기고 목숨을 가벼히 여기었기에 다행히도 몸이 욕을 당함은 면하였습니다. 누가 마디마다 재된 내 마음을 불쌍히 여길 것이며 갈기갈기 끊어진 썩은 내 마음을 다시 이어 주겠습니까? 해골이 들판에 던져지고 간담은 땅에 쳐 발리었는데. 가만히 헤아려보니 즐거웠던 그 옛날도 당일에는 슬픔과 원망이었지요. 이제는 봄소식이 이미 깊은 골짝에 불어오고 천녀는 다시 양계에 돌아왔으니, 봉래산에는 일기동안 살자한 언약이 아직도 그윽하고 취굴섬에는 삼생동안 지내던 향내마저 풍겨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좋지 못한 일이 겹쳤지마는 지난날 맹세를 저바리지 않겠다 기약했지요. 혹여 잊지 않았다면 결국 잘된 것이라 여겨지는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이생은 매우 기뻐하며 감사히 여겨 답하였다.

참으로 내가 바라던 바요.”

둘은 애틋한 정을 나누다, 집안 재산이 도적들에게 얼마나 노략질 당했는지에 말이 이르자, 여자가 말했다.

조금도 잃지 않고 아무개 산골짝이 묻어 두었지요.”

또 양가 부모님의 유골이 어디 묻혀 있는지를 물었더니 최랑이 말했다.

하는 수 없이 아무개 골짝에 버려 두었지요.”

둘은 이야기를 끝낸 뒤 함께 잠자리에 들어 즐기니 기쁜 정은 옛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이튿날 둘은 함께 옛날 살고 있던 곳을 찾으니 과연 금은 재보를 얻고 부모의 유골도 거둘 수 있었다. 그것들을 팔아 오관산 기슭에 합장하였다. 장례를 마친 뒤 이생은 벼슬을 구하지 않고 최랑과 함께 살림을 차림에 흩어졌던 노복도 점차 모여들었다.

이생은 이로부터 인간의 모든 일을 전혀 잊어 버렸다. 비록 친척 빈객의 방문이며 길흉사도 제쳐놓고 문을 굳게 닫고 최랑과 함께 시구를 창수하며 금슬의 화락을 누린 지 수년이 지났다.

하루 저녁에는 최랑이 이렇게 말했다.

세상 일이 하도 덧없어 세 번째의 가약도 이제 장차 끝나게 되었으니 한없는 슬픔을 어이 하오리까?”

왠 말이오?”

저승길은 피하지 못하는 것이오라 저와 당신은 천연히 정해 있고 또 전생에 아무런 죄악도 없으므로 이 몸을 잠깐 빌려 당신과 거듭 만나게 되었사오나 어찌 인간 세상에 오래 있어 산 사람을 유혹하오리까?”

문답이 끝나자 최랑은 향아를 시켜 주과를 드리고 옥루춘 한 가락을 부르며 이생에게 술을 권하였다.

 

난리 풍상 몇 해던고? 옥만큼 고운 얼굴.

꽃같이 흩어지곤 짝을 잃은 원앙이라.

남은 해골 굴러 굴러 뉘라서 묻어 주리.

피투성이 변한 혼은 하소연도 할 곳 없네.

슬퍼라! 이내 몸은 비구름이 되단 말가.

깨뜨린 종일사 이제 거듭 나누려니,

이마저 하직하면 천추에 유한이라.

망망한 천지 사이 음심조차 막히리라.

 

한 곡조 노래 소리에 눈물이 자주 내려 거의 곡조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생도 또한 슬픔을 걷잡지 못하여 말하였다.

내 차라리 당신과 함께 지하로 돌아갈지언정 어찌 무료히 홀로 여생을 보전하겠소? 이미 난리를 평정한 뒤 친척과 노복이 흩어지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골이 들판에 버려졌을 때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알려 주었겠소. 옛 성인의 말씀에 [어버이 계실 때 예로 섬길 것이며 돌아가신 뒤에 예로 장사지낼 것이니라]하였는데 이제 당신이 이 모두를 실천하였는데 내 어찌 감사의 뜻을 마지 않겠소? 아무쪼록 당신은 인간 세상에 오래 살아 백년의 행복을 누린 뒤 나와 함께 진토가 됩시다.”

당신의 명수는 아직 남아 있고 저는 이미 귀신의 명부에 실렸사오니 만일 인간의 미련을 가지면 명부의 법령에 위반되어 제게 죄과가 미칠 뿐아니라 당신까지 누가 미치게 될 것이니다. 다만 제 끼친 해골이 아무개 골짝에 흩어져 있으니 만일 은혜를 거듭하와 사체를 거두어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나이다.”

말이 끝나자 최랑의 육체는 점차 사라지더니 종적도 없어져 버렸다. 이생은 그 말대로 해골을 거두고 부모의 뫼 곁에 장사한 뒤 그도 병을 얻은 지 수개월만에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이 일을 들은 이들은 모두 아쉬워하며 그들의 아름다운 절개를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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