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생기우전>
고려조에 하생(何生)이란 사람이 있어 평원(平原)에 살았다. 집안이 대대로 한미한데다 일찍 부모를 잃었다. 장가들려 하나 청혼하는 곳이 없었고 궁핍하여 스스로 생활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풍도와 거동이 매우 뛰어나고 재주와 생각도 뛰어나, 마을에서는 그의 어짐을 칭찬하는 이가 많았다. 고을의 수령이 그 명성을 듣고 뽑아 태학(太學)에 맡겼다. 선비는 장차 단정히 차리고 서울로 올라가려는데 출발에 임하여 비복(婢僕)에게 말했다.
「나는 위로 부모도 없고 아래로 처자도 없다. 그러니 무엇때문에 너희들에게 이것저것 많은 말을 하겠느냐? 옛날 종군(從軍)은 신표를 버렸고, 사마상여는 기둥에 글을 써서 약관에 모두 큰 뜻을 가졌었다. 내가 비록 둔하고 부족하나, 둘의 사람됨을 경모하고 있다. 다른 날 금의환향하여 돌아와 너희들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니, 가업을 잘 지켜 실추되지 않게 하길 바란다.」
국학에 이르러 여러 선비와 재주를 겨루니 어떤 이도 앞설 수 있는 자가 없었다. 하생은 장원급제하여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고 오만하게 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높은 뜻을 가졌으나, 당시 조정의 정치는 이미 어지러웠고 과거시험도 또한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럭저럭 사오 년 학사(學舍)에서 억울함을 안고 항상 못마땅해 즐겁지 않았다. 하루는 같은 학사의 선비에게 말했다.
「채택(蔡澤)도 알지 못하는 것은 목숨이라. 당생(唐生)을 따라 결정하였소. 내가 듣건대 낙타교 곁에 점장이가 있는데 사람의 장수함과 요절함, 재앙과 복록을 말한다고 하오. 날짜를 작정해 장차 나아가 점을 쳐 의혹을 해결하겠소.」
드디어 자기 집으로 돌아와 상자 속을 뒤져 간직했던 보배와 금전 몇 냥을 얻어서는 품고 갔다.
점장이는 말했다.
「부유함과 존귀함은 공께서 본뒤 가진 바이나, 다만 오늘이 매우 길하지 못하오. 점은 명이괘(明夷卦)가 가인괘(家人卦)로 감을 얻었소. 명이괘는 밝음이 땅으로 들어가는 상이고, 가인괘는 세상을 피해 한가히 사는 사람의 곧은 지조를 만남이니 이롭소. 국도(國都)의 암문을 나가 빨리 뛰어 날이 저물 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음이 옳소. 단지 재앙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또한 아름다운 짝을 얻으리다.」
하생은 그 뜻에 미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 두려운 마음으로 일어나 작별하고는 인하여 국도 남문으로 나갔다. 가을 산은 가히 아름다웠고 뜻에 따라 길을 가던 바 해가 이미 저물어 어두운 것도 깨닫지 못했다. 사방을 돌아보니 인적이 끊어져 의탁해 잘 곳도 없었고 허기와 고단함도 또한 밀려왔다. 길 곁을 배회하는데 때는 팔월 십팔일이었다. 산에 달은 아직 뜨지 않았는데 멀리 나무 속을 바라보니 등불 하나가 별빛처럼 깜빡였다. 생각에 사람의 집이 있으려니 하고 길을 찾아 앞으로 갔다. 싸늘한 안개는 풀에 엉기고 내린 이슬은 촉촉했다. 그곳에 이르니 달 또한 밝았다. 바라보니 작고 화려한 집 하나가 있는데, 그림같은 본채가 담장 밖으로 높이 솟았고, 사창 안에는 촛불 그림자가 푸르게 빛났다. 바깥 문은 반쯤 열렸는데, 조금도 사람의 자취는 없었다. 선비는 이상해 하며 가만히 들어가 엿보니 나이가 열 여섯 살쯤 되는 미인이 있었다. 각진 베개에 의지하여 반쯤 비단 이불에 가리운, 근심스런 얼굴에 고운 태도는 눈으로 바로 응시하기 어려웠다. 이에 턱을 괴고 크게 탄식하더니, 가늘게 두 절구를 읊었다.
향로에 연기 다하고 동방은 닫혔는데
한가로운 근심에 뜻없이 원앙을 수놓도다.
편지 한 번 끊어지니 가을하늘 싸늘하고
지는 달 아름다이 대들보를 비추도다.
분갑에는 먼지 날고 구리거울은 녹슬어
꿈속에 만난 님 잠깨니 허황하도다.
비단 휘장의 밤은 깊어 기러기가 이르고,
늙은 홰나무, 성긴 버들에 밝은 달이 비추도다.
시의 뜻을 본즉 수자리 사는 이의 아내 같고, 용모와 행동이 또한 귀한 집 처녀와 같았다. 지키는 자가 있을까 겁내고 떨며 물러나려다가 발소리가 저벅저벅 하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미인은 시녀를 불러 말했다.
「금환아! 옥환아! 창 밖에 저벅저벅 소리 내는 자가 누구냐?」
두 시녀가 함께 대답을 했다.
「우리 두 사람은 바야흐로 선잠이 들었습니다. 뒷 마루 창밖에 달이 밝을 뿐 또 누가 있겠습니까?」
미녀는 가느다란 어조로 말했다.
「어젯밤에 아름다운 꿈이 있어, 진정 너에게 말했었다. 이는 좋은 선비가 옴이 아니냐?」
인하여 서로 함께 농담하며 웃었다. 선비는 어렴풋이 그 소리를 듣고 또 점장이의 말이 생각나서 마음 속으로 스스롤 기뻐하고는 드디어 문을 두드리고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곧 두 시녀가 문을 밀치고 대답하여 말했다.
「산에 있는 집이고 밤도 깊은데, 손님은 무엇하는 사람이시오?」
선비는 말했다.
「나는 봄을 찾는 최호(崔護) 술에 목말라 음료수를 구함이 아니고 홀로 가다가 길을 잃었을 뿐이오. 하룻밤 유숙을 부탁하오.」
시녀는 혀를 차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작은 낭자가 홀로 우거하는 곳이니 진실로 손님이 잘 곳은 아닙니다.」
하고는 곧 문을 잠그고 들어갔다.
선비는 마음이 미혹되고 생각이 짧아 망연히 넋을 잃고, 문에 기대 방황할 뿐이었다. 밤이 오래되자 홀연 문이 철컥 열리는 소리에 놀랐는데 앞의 시녀가 문을 열며 말했다.
「낭자께서는 손님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아시고서, 말하기를 “산에 승낭이 호랑이가 많고 사방에 이웃도 없다. 곤궁하기에 와서 의탁했는데 거절하면 상서롭지 못하다.”하시고, 사랑방에 거처토록 허락하셨습니다. 손님께서는 들어와 유숙하십시오.」
선비는 절해 사례하고 머물 곳으로 나아갔다. 깨끗한 방은 꾸밈이 없어 자연스러웠고 잠자리도 곱고 아름다웠다. 방안에는 황금 빛 주렴이 걸려 있고 책상 위에는 옥돌로 된 벼루와 채색 붓과 꽃무늬 종이 몇 폭이 있었고, 곁에는 은 항아리와 향을 먹인 기름과 향로가 있어 연기가 그윽하게 빛나며 향기롭고, 또 제공하는 술과 음식도 극히 향기롭고 깨끗했다. 시녀는 조금 뒤 주인 낭자의 명령으로 와서 물었다.
「과부의 거처라 외지고 누추합니다. 손님은 무슨 연고로 여기에 이르렀습니까?」
하생은 방안에 다른 사람이 없음을 헤아리고는 여자의 뜻을 시험하고자 하며 이에 답했다.
「소생은 일찍이 재주와 명성에 힘입어 국빈(國賓)으로 성균관에 들어갔습니다. 항상 곡앵시(谷鸎詩)를 읊고, 늘 진량(陳良)의 학문을 비루하게 여겼습니다. 망령되이 출세에 뜻을 두고 고위직을 얻을 수 있다 여기며 공로를 가리켜 취할 수 있다 하고는, 부유함과 존귀함이 하늘에 있으며 길함과 흉함이 사람에게 말미암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지나다 들은 점장이의 말로 마침내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아울러 점장이의 말을 고했다. 시녀는 말을 듣고 갔다가 웃으면서 돌아와서는 다시 말했다.
「연약한 저도 또한 점장이의 말을 믿고 재액을 면하러 여기에 왔으니 우연이 아닙니다. 방이 비록 누추하나 청컨대 하룻밤 유숙함이 좋겠습니다.」
하생은 그 말이 더욱 이상해 궁금함을 견딜 수 없었다. 즉시 책상 위의 꽃무늬 종이를 가져다 단편 시 두 장을 써서 시녀에게 부치며 말했다.
「방을 빌리고 이미 은밀한 정의 많음이 이와 같으니 입으로 진술해 사례하기 어렵소.」
하고는 시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맑고 맑은 은하수 그림자는 반이나 비꼈고
비단 발 무겁게 내려 구름을 가린 병풍이로다.
직녀의 베틀 곁 지남을 싫어하지 않으니,
도리어 엄군평이 객성 알아봄을 괴이해 하도다.
향기로운 기운은 끊임없고 구름은 비로소 흩어지는데
아름다운 절개 드높이나 봉황이 중매하지 않도다.
애끊는 하룻 밤 외로운 베개의 꿈
문득 양대에 이르러 길 없음을 안타까워 하노라.
시녀가 가지고 간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꽃무늬 종이를 가지고 와서 하생 앞에 내놓았다. 바로 주인 낭자가 화답한 것이었다. 그 시에는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 원앙침을 베고서
활짝핀 꽃을 꺾어 가득 머리에 꽂는 꿈을 꾸었다오.
시녀와 함께 마음 속의 일을 말하고
화장 경대를 보려고 하니 문득 부끄러움만 생긴다오.
달을 기다리려 열린 창을 밤에도 닫지 않았는데
조롱의 앵무새는 잠을 비로소 이루도다.
잎은 아름다이 떨어져 마음을 울리니
흡사 정이 없는 듯하나 다시 정이 있다오.
하생은 시를 읽고 비록 여자의 뜻을 알았으나, 미덥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했다. 여자의 방을 보니 가까운데다 또 닫히지도 않았고, 시녀는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처음엔 오로지 방안에서 배회할 듯이 하다가 걸어 드디어 나아갔다. 손을 가뿐히 하여 창을 열자 여자는 바야흐로 쓸쓸하고 근심스러이 앉아 마치 기다리는 바가 있는 듯했다. 하생은 나아가 함께 온화히 웃으며 말했다.
「어찌 듣지 않았겠습니까? 세속의 노랫말에 말하기를 “손님이 있으면 문을 빌려 유숙시키고, 밤이 깊으면 곧 집을 빌려준다. 주인은 오리를 때리지 마소. 오리를 때리면 원앙이 놀라오.”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땋은 머리를 낮추고 교태롭게 수줍어 하며 다만 말하기를,
「업보의 인연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피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때는 쇠잔한 등불이 병풍을 등지고 밝았다가 꺼지려 했다. 여인은 장차 누우려다가 하생에게 말했다.
「제가 일찍이 위소주(韋蘇州)의 시를 사랑했는데, “홀로 사는 사람 장차 자려고 띠를 풀었다가 다시 맨다.”라고 말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밤은 더욱 그 진의를 알겠습니다.」
서로 함께 즐거이 희롱하고 매우 다정함을 다했다. 밤이 장차 밝으려는데 여인은 하생의 팡를 베고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다. 하생이 놀라 말했다.
「겨우 좋은 만남을 이루었는데 갑자기 그대가 이와 같음은 어째서이오?」
여인이 말했다.
「여기는 현세의 인간 세상이 아닙니다. 저는 바로 시중 아무개의 딸로 죽어서 여기에 묻힌 지 지금 이미 사흘입니다. 저희 아버님은 오랫동안 권세의 요직에 있으면서 눈흘김에 남을 얽어 상해함이 매우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다섯 아들과 딸이 하나 있었는데, 다섯 오라비는 모두 아버님보다 앞서 요절했고, 제가 홀로 곁에 있다가 지금 또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상제께서 저를 불러 명령에 말하기를 “네 아비는 조금 뒤에 큰 옥사에 국문을 받을 것이고 죄없는 수십 명은 살아날 것이다. 지난날 남을 얽어 상해한 죄를 속죄할 수는 있으나, 다섯 아들은 죽은 지 이미 오래 되어 보낼 수 없겠고, 마땅히 너를 보내 돌아가게 하리라.”하여 저는 절하고 물러났는데, 기한이 다음날 새벽까지이므로, 이를 지나면 다시금 깨어날 가망이 없었습니다. 지금 낭군을 만났으니 이 또한 운명입니다. 길이 의탁해 좋아하며 끝까지 수건과 빗을 받들고자 하오나, 허락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생도 또한 울며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응당 목숨을 걸고 그렇게 하겠소.」
여인이 이에 베갯머리에서 금척(金尺) 하나를 꺼내 주며 말했다.
「낭군께서는 이것을 가지고 가서 국도의 저자거리 큰 절 앞에 있는 하마석 위에다 올려놓으십시오. 반드시 알아보는 자가 있을 겁니다. 비록 곤욕을 당하더라도 제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생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여인이 하생에게 빨리 일어나 떠날 것을 재촉했다. 드디어 손을 맞잡고 이별하며 시 한 구절을 읋어 하생을 배웅했다.
산꽃이 갓 떨어지고 새소리 정답더니
봄소식이 무단히 어둠 속에도 돌아왔네.
한 번 생명을 맡겨 은의가 주앟게 되었으니
어서 금척을 가지고 인간 세상에 나가시오.
하생도 한 구절을 읋어 이별을 하고 또 여인의 뜻을 다짐했다.
꽃은 비단 장막 속에 있고 푸른 구름이 잠겼는데
노니는 벌 찾아드는 걸 또 허락하시려오.
분명한 소매 속의 황금 자를 가지고
인정의 깊고 얕음을 재어보고 싶어라.
여인이 울음을 그치고 말했다.
「첩이 창류(倡類)가 아닌데 어찌 이토록 박하게 대하십니까? 나가시는 길이나 잘 살펴가시고 제 마음이 변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생이 문을 나와 몇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바로 새로 쓴 무덤만 하나 있었다. 슬픈 마음으로 눈물을 닦으며 돌아와서 큰 절 앞에 이르니, 과연 네모난 반석이 하나 있었다. 금척을 꺼내 돌 위에 올려 놓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무도 관심 있게 보는 이가 없었다. 해가 중천에 오를 무렵 소복 차림을 한 세 여인이 시장을 나왔다가 지나가더니, 뒤에 가던 한 여인이 금척을 발견하고는 반석 주위를 세 번 돌고 돌아갔다.
얼마쯤 지나서 그 여인이 건장한 노복 몇 명을 데리고 와서는 하생을 잡아 묶고는 말했다.
「이것은 작은 아씨 무덤에 순장하였던 물건이다. 너는 묘도둑이구나.」
하생은 무덤 속 여인의 부탁도 있고 사랑하는 마음도 핑은지라 고개를 숙이고 욕을 당하면서도 감히 입을 열지 않았다. 보는 자들이 모두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겼다. 그 집으로 끌고 가서 하생을 뜰 아래에 묶어 놓았다. 시중이 오궤(烏几)에 기대어 청사(廳事)에 앉아 있고 자리 뒤에는 주렴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시녀들이 수십 명 둘러 모여 있는데 서로 보려고 밀치면서 말했다.
「생긴 것은 선비처럼 생겼는데 행실은 도적이구먼.」
시중이 금척을 가져다가 알아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과연 내 딸의 무덤에 순장했던 금척이다.」
주렴 안에서 흑흑 울음소리가 들렸고 시녀들도 모두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시중이 손을 저어 그치게 하고 하생에게 물었다.
「너는 뭐하는 사람이며 이 물건은 어디서 났느냐?」
하생이 대답하였다.
「저는 태학생이고 이것은 무덤 안에서 얻었습니다.」
시중이 말했다.
「네가 입으로는 시(詩)와 예(禮)를 말하면서 행실이 무덤이나 파는 도적과 같으니 될 말인가?」
하생이 웃으며 말했다.
「제 결박을 풀고 가까이 가게 해주십시오.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대인께서는 은혜 갚을 것을 생각하셔야지 도리어 화를 내시면 되겠습니까?」
시중이 즉시 결박을 풀게 하고 뜰 위로 오르게 하니, 하생은 드디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해 주었다. 시중이 부끄러운 얼굴로 한참 있다가 말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비복들이 서로 돌아보며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주렴 안에서 흐느끼며 말했다.
「일이 헤아리기 어려우니 확인해보고 죄를 주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서생이 하는 말을 들으니 우리 딸이 살았을 적 용모나 복장과 똑같습니다. 필시 틀림없을 것입니다.」
시중이 말했다.
「그래. 즉시 삼태기와 삽을 준비하고 가마를 갖추어라. 내 직접 가보겠다.」
노비 몇 명을 남겨 하생을 지키게 하고 무덤으로 갔다. 무덤에 도착해 보니 무덤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이에 이상히 여겨 파보았다. 여인은 얼굴빛이 살아 있는 것과 같았고 가슴에는 따스한 기운이 조금 있었다.
유모 할미를 시켜 싸안고 수레에 태워 돌아왔다. 의원을 부를 겨를도 없어서 요동되지 않게 가만히 놓아두었는데, 해가 저물 무렵 바야흐로 깨어났다. 부모를 보고 가늘게 흐느끼더니, 조금씩 안정이 되었다. 부모가 물어보았다.
「네가 죽은 뒤 무슨 이상한 일이 있었더냐?」
여인이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저는 꿈인 줄 알았는데 그게 죽음이었습니까? 이상한 일은 없었습니다.」
부모가 굳이 물으니 여인이 비로소 말을 하는데, 하생이 했던 말과 꼭 들어맞았다. 온 집안 사람들이 무릎을 치며 놀라워했다. 이렇게 되자 하생에 대한 대우가 퍽 좋아졌다.
며칠이 지나 여인이 건강을 회복하였다. 시중이 성대한 잔치를 열어 하생을 위로하고 이어 집안 형편이며 장가를 들었는지 물었다. 하생은 장가는 아직 들지 않았으며 아버지는 평원(平原) 고을의 교생(校生)이었는데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다. 시중이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가 부인과 의논하더니 말했다.
「하생은 용모와 기개로 보아 실로 보통 사람이 아니니, 사위로 삼는 데 있어 무슴 망설일 게 있겠소? 다만 집안이 우리와는 맞지 않고 일도 또한 꿈같이 허탄하니, 이번 일로 해서 그와 혼사를 이룬다면 세상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길까 염려되오. 내 생각으로는 많은 답례품을 주어서 보답하는 것이 좋겠소.」
부인이 말했다.
「이 일은 대인(大人)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니, 부녀자가 어찌 간여할 수 있겠습니까?」
하루는 다시 잔치를 열고 하생을 위안하였는데, 하생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물으면서 혼인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하생은 분한 마음으로 처소로 돌아와서 가슴을 치고 속상해하며 여인이 약속을 저버린 것을 원망했다. 이어 시를 한 편 지어 여인의 유모 할미에게 부탁하여 여인에게 전하게 하였다.
흙탕물 옥에 묻어도 옥은 변함이 없을테고
봉황이 제 둥지를 찾았으니 난새를 돌아보려 하겠는가?
팔 위의 눈물 자국 아직도 또렷한데
다만 이제 도리어 꿈속에서나 보겠구나.
여인이 시를 보고 놀라 그 동안의 사정을 물어보고 비로소 부모가 하생을 배반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갑자기 몸이 아파다고 하면서 음식을 먹지 않았다. 부모가 속으로 딸의 마음을 알고 병의 빌미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딸이 울면서 말했다.
「부모를 멀리하는 것도 불효입니다만 부모의 사소한 잘못을 들추는 것도 역시 불효라고 합니다. 감히 소원하게 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잘못을 들추어 부모님께 누를 끼칠까 염려가 됩니다.」
부모가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거라. 뭇할 말이 무엇이냐?」
여인이 비녀와 귀걸이를 풀고 일어나 절하고 대죄하여 말했다.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어, 깊은 사람 받은 막내 어여쁘게 자랐답니다. 정숙하게 집안에서 음식 솜씨 훌륭했고 저녁 문안 아침 조반 탈없이 잘 해냈답니다. 옥황상제 노여움이 악한 집에 재앙 내려. 망극하신 부모 은혜 근심으로 갚게 됐답니다. 다섯 아들 두었는데 부모 먼저 죽게 되어 죄 없는 우리 남매 무덤 덮은 가시 덩굴, 하늘은 밝으시어 덕 닦음을 다 아시고, 한 가지 착한 일로 이 몸에 은혜 내리셨지요. 혼백 돌아갈 길이 있어 지하에서 일어나서 잠 못 들고 가슴 치며 원한 맺는 긴긴 밤에, 동산 위엔 달도 밝고 반가워라 님을 만나 단단히 맺은 언약 같이 죽자 하였답니다. 담을 뚫고 지붕 뚫어 죽은 목숨 살렸으니 황천엔 길 없으나 무덤 굴엔 통로 있겠지요. 즐겁고 즐거우니, 그 즐거움 크답니다. 나무 꺾지 않으시고 이슬 길도 아니 가고, 은혜 갚을 생각하다 이에 사랑을 주었답니다. 아버님! 어머님! 이제부터 앞으로 복 받을 일 많이 하여 후손 편안케 하옵소서. 어찌 운명을 어기고 제 생각은 않으신지요. 끼륵끼륵 기러기 울고 아침 햇살 비쳐오니 방실방실 복사꽃은 때 놓치면 아니 된답니다. 님을 다시 만나는 것은 저의 소원, 저의 결심이랍니다. 시경 용풍 백주시는 굳은 마음 맹세한 시거니, 이럴 줄 알았다면 깨어나지 말 것을. 백주시 지은 공강이여! 귀신 되어 함께 가리.」
시중이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며 말했다.
「내가 진실되지 못하고 사랑이 모자라서 너를 이 지경까지 만들었구나.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남녀의 만남은 하늘이 정해둔 것이니 너를 위해 성사시켜 보도록 하마.」
모부인(母夫人) 역시 위로하며 달래었다. 여인은 비로소 일어나 머리 빗고 화장을 하고는 유모를 통해 하생에게 답시를 적어 보냈다.
갓 솟은 환한 달빛 산골에 가득한데
도리의 봄 마음을 나비가 이미 알았더라.
돌 위에서 맺은 원한 노랫소리 울려나니
일찍이 옥황께서 이몸 운명 정하셨네.
시중이 듣고 “이 일은 늦출 수가 없겠구나.” 하고는 즉시 하생을 불러 혼인시킬 뜻을 전달하며 말했다.
「혼례에 쓰이는 물건을 우리가 마련하겠네.」
드디어 하생을 그의 숙소로 돌려보냈다가 날을 가려 예를 갖춰 맞아드렸다. 하생이 여인과 다시 만나 비단 장막을 치고 촛불을 밝히고 마주하니 완연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하생이 말했다.
「새로 결혼하는 것도 매우 즐거운 일인데, 헤어졌던 부부가 다시 만나는 것이야 그 즐거움이 어떠 하겠소? 나와 그대는 새 즐거움과 옛 정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니, 세상의 많고 많은 부부 가운데 우리와 같은 자가 누가 있겠소?」
여인이 말했다.
「일찍이 들으니 불가(佛家)에 삼생설(三生說)이 있는데 과거 현재 미래가 바로 이것이랍니다. 과거에 이미 낭군과 더불어 부부가 되었고 현재 또 낭군과 더불어 부부가 되었는데 다만 미래에는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삼생의 인연을 맺은 일이 예전에도 있었습니까?」
이로부터 부부가 되어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여 비록 양홍(梁鴻)과 맹광(孟光), 극결(郤缺)과 그 아내라도 견줄 바가 못 되었다. 이듬해 하생은 대과에 합격하여 보문각(寶文閣)에서 첫 벼슬살이를 시작해서 뒤에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여인과 부부가 되어 무릇 사십 여 년을 함께 살았다.
두 아들을 낳아 맏이를 적선(積善)이라 하고 둘째를 여경(餘慶)이라 하였는데, 모두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다. 하생이 혼인을 정한 날에 예전의 그 점쟁이를 찾아갔더니 이미 자리를 옮겨 뜨고 없었다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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