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만복사저포기>

 



전라도 남원에 양생이 살고 있었는데, 일찍이 어버이를 잃은 데다 아직 장가도 들지 못했으므로 만복사(萬福寺)의 동쪽에서 혼자 살았다. 방 밖에는 배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마치 봄이 되어 꽃이 활짝 피었다. 마치 옥으로 만든 나무에 은조각이 쌓여 있는 것 같았다. 양생은 달이 뜬 밤마다 나무 아래를 거닐며 낭랑하게 시를 읊었는데, 그 시는 이렇다.

 

한 그루 배꽃이 외로움을 달래 주지만

휘영청 달 밝은 밤은 홀로 보내기 괴로워라.

젊은 이 몸 홀로 누운 호젓한 창가로

어느 집 고운 님이 퉁소를 불어 주네.

 

외로운 저 물총새는 제 홀로 날아가고

짝 잃은 원앙새는 맑은 물에 노니는데,

바둑알 두드리며 인연을 그리다가

등불로 점치고는 창가에서 시름하네.

 

시를 다 읊고 나자 갑자기 공중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그대가 참으로 아름다운 짝을 얻고 싶다면 어찌 이뤄지지 않으리라고

걱정하느냐?"

양생은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그 이튿날은 마침 삼월 이십 사일이었다. 이 고을에서는 만복사에 등불을 밝히고 복을 비는 풍속이 있었는데, 남녀들이 모여들어 저마다 소원을 빌었다. 날이 저물고 법회도 끝나자 사람들이 드물어졌다. 양생이 소매 속에서 저포를 꺼내어 부처 앞에다 던지면서 (소원을 빌었다.)

"제가 오늘 부처님을 모시고 저포놀이를 하여 볼까 합니다. 만약 제가 지면 법연(法筵)을 차려서 부처님께 갚아 드리겠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지시면 아름다운 여인을 얻어서 제 소원을 이루게 하여 주십시오."

빌기를 마치고 곧 저포를 던지자, 양생이 과연 이겼다. 그래서 부처 앞에 무릎은 꿇고 앉아서 말하였다.

"인연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속이시면 안 됩니다."

그는 불좌(佛座) 뒤에 숨어서 그 약속에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다. 얼마 뒤에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들어오는데, 나이는 열대 여섯쯤 되어 보였다. 머리를 두 갈래로 땋고 깨끗하게 차려 입었는데, 아름다운 얼굴과 고운 몸가짐이 마치 하늘의 선녀 같았다. 바라볼수록 얌전하였다.

그 여인은 기름병을 가지고 와서 등잔에 기름을 따라 넣은 다음 향을 꽂았다. 세 번 절하고 꿇어앉아 슬피 탄식하였다.

"인생이 박명하다지만, 어찌 이럴 수가 있으랴?"

그리고는 품속에서 축원문을 꺼내어 불탁 위에 바쳤다. 그 글은 이렇다.

 

아무 고을 아무 동네에 사는 소녀 아무개가 (외람 됨을 무릅쓰고 부처님께 아룁니다.) 지난번에 변방의 방어가 무너져 왜구가 쳐들어오자, 싸움이 눈앞에 가득 벌어지고 봉화가 여러 해나 계속되었습니다. 왜놈들이 집을 불살라 없애고 생민들을 노략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동서로 달아나고 좌우로 도망하였습니다. 우리 친척과 종들도 각기 서로 흩어졌었습니다. 저는 버들처럼 가냘픈 소녀의 몸이라 멀리 피난을 가지 못하고, 깊숙한 규방에 들어 앉아 끝까지 정절을 지켰습니다. 윤리에 벗어난 행실을 저지르지 않고서 난리의 화를 면하였습니다. 저의 어버이께서도 여자로서 정절을 지킨 것이 그르지 않았다고 하여, 외진 곳으로 옮겨 초야에 붙여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런지가 벌써 삼 년이나 되었습니다.

가을 달밤과 꽃 피는 봄날을 아픈 마음으로 헛되이 보내고, 뜬구름 흐르는 물과 더불어 무료하게 나날을 보냈습니다. 쓸쓸한 골짜기에 외로이 머물면서 제 박명한 평생을 탄식하였고, 아름다운 밤을 혼자 지새우면서 (짝 잃은) 채란(彩鸞)의 외로운 춤을 슬퍼하였습니다.

그런데 날이 가고 달이 가니 이제는 혼백마저 사라지고 흩어졌습니다. (기나긴) 여름날과 겨울밤에는 간담이 찢어지고 창자까지 찢어집니다. 오직 부처님께 비오니, 이 몸을 가엽게 여기시어 각별히 돌보아 주소서. 인간의 생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으며 선악의 응보를 피할 수 없으니, 제가 타고난 운명에도 인연이 있을 것입니다. 빨리 배필을 얻게 해주시길 간절히 비옵니다.

 

여인이 빌기를 마치고 나서 여러 번 흐느껴 울었다. 양생은 불좌 틈으로 여인의 얼굴을 보고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으므로, 갑자기 뛰쳐나가 말하였다.

"조금 전에 글을 올린 것은 무슨 일 때문이신지요?"

그는 여인이 부처님께 올린 글을 보고 얼굴에 기쁨이 흘러 넘치며 말하였다.

"아가씨는 어떤 사람이기에 혼자서 여기까지 왔습니까?"

여인이 대답하였다.

"저도 또한 사람입니다. 대체 무슨 의심이라도 나시는지요? 당신께서는 다만 좋은 배필만 얻으면 되실 테니까, 반드시 이름을 묻거나 그렇게 당황하지 마십시오."

이때 만복사는 이미 퇴락하여 스님들은 한쪽 구석진 방에 머물고 있었다. 법당 앞에는 행랑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고, 행랑이 끝난 곳에 아주 좁은 판자방이 있었다.

양생이 여인의 손을 잡고 판자방으로 들어가자, 여인도 어려워하지 않고 들어왔다. 서로 즐거움을 나누었는데, 보통 사람과 한 가지였다.

이윽고 밤이 깊어 달이 동산에 떠오르자 창살에 그림자가 비쳤다. 문득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여인이 물었다.

"누구냐? 시녀가 찾아온 게 아니냐?"

시녀가 말하였다.

". 평소에는 아가씨가 문 밖에도 나가지 않으시고 서너 걸음도 걷지 않으셨는데, 어제 저녁에는 우연히 나가셨다가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여인이 말하였다.

"오늘의 일은 우연이 아니다. 하느님이 도우시고 부처님이 돌보셔서, 고운 님을 맞이하여 백년해로를 하게 되었다. 어버이께 여쭙지 못하고 시집가는 것은 비록 예법에 어그러졌지만, 서로 즐거이 맞이하게 된 것은 또한 평생의 기이한 인연이다. 너는 집으로 가서 앉을 자리와 술안주를 가지고 오너라."

시녀가 그 명령대로 가서 뜨락에 술자리를 베푸니, 시간은 벌써 사경(四更)이나 되었다. 시녀가 차려 놓은 방석과 술상은 무늬가 없이 깨끗하였으며, 술에서 풍기는 향내도 정녕 인간 세상의 솜씨는 아니었다.

양생은 비록 의심나고 괴이하였지만, 여인의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맑고 고우며 얼굴과 몸가짐이 얌전하여, '틀림없이 귀한 집 아가씨가 (한때의 마음을 잡지 못하여) 담을 넘어 나왔구나' 생각하고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여인이 양생에게 술잔을 올리면서 시녀에게 명하여 '노래를 불러 흥을 도우라' 하고는, 양생에게 말하였다.

"이 아이는 옛 곡조밖에 모릅니다. 저를 위하여 새 노래를 하나 지어 흥을 도우면 어떻겠습니까?"

양생이 흔연히 허락하고는 곧 <만강홍(滿江紅)> 가락으로 가사를 하나 지어 시녀에게 부르게 하였다.

쌀쌀한 봄추위에 명주 적삼은 아직도 얇아

몇 차례나 애태웠던가, 향로불이 꺼졌는가 하고,

날 저문 산은 눈썹처럼 엉기고

저녁 구름은 일산처럼 퍼졌는데,

비단 장막 원앙 이불에 짝지을 이가 없어서

금비녀 반만 꽂은 채 퉁소를 불어 보네.

아쉬워라, 저 세월이 이다지도 빠르던가

마음 속 깊은 시름이 답답하여라.

낮은 병풍 속에서 등불은 가물거리는데

나 홀로 눈물진들 그 누가 돌아보랴.

기뻐라, 오늘밤에는

피리를 불어 봄이 왔으니,

겹겹이 쌓인 천고의 한이 스러지네

<금루곡> 가락에 술잔을 기울이세.

한스런 옛시절을 이제 와 슬퍼하니

외로운 방에서 찌푸리며 잠이 들었었지.

 

노래가 끝나자 여인이 서글프게 말하였다.

"지난번에 봉도(蓬島)에서 만나기로 했던 약속은 어겼지만, 오늘 소상강(瀟湘江)에서 옛 낭군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천행이 아니겠습니까? 낭군께서 저를 멀리 버리지 않으신다면 끝까지 시중을 들겠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제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영원히 자취를 감추겠습니다."

양생이 이 말을 듣고 한편 놀라며 한편 고맙게 생각하여 대답하였다.

"어찌 당신의 말에 따르지 않겠소?"

그러면서도 여인의 태도가 범상치 않았으므로, 양생은 유심히 행동을 살펴보았다. 이때 달이 서산에 걸리자 먼 마을에서는 닭이 울고 절의 종소리가 들려 왔다. 먼동이 트려 하자 여인이 말하였다.

"얘야. 술자리를 거두어 집으로 돌아가거라."

시녀는 대답하자마자 없어졌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여인이 말하였다.

"인연이 이미 정해졌으니 낭군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양생이 여인의 손을 잡고 마을을 지나가는데, 개는 울타리에서 짖고 사람들이 길에 다녔다. 그러나 길가던 사람들은 그가 여인과 함께 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양총각, 새벽부터 어디에 다녀오시오?"

하였다. 양생이 대답하였다.

"어젯밤 만복사에서 취하여 누웠다가 이제 친구가 사는 마을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날이 새자 여인이 양생을 이끌고 깊은 숲을 헤치며 가는데, 이슬이 흠뻑 내려서 갈 길이 아득하였다. 양생이

"어찌 당시 거처하는 곳이 이렇소?"

하자 여인이 대답하였다.

"혼자 사는 여자의 거처가 원래 이렇답니다."

여인이 또(시경

 

에 나오는 옛시 한수를 외워) 농을 걸어왔다.

 

축축히 젖은 길이슬

이른 아침과 늦은 밤엔 어찌 다니지 않나?

길에 이슬이 많기 때문이라네.

 

양생또한 (시경에 나오는 옛시 한 수를)

 

여우가 어슬렁어슬렁

저 기수 다릿목에 어정거리네,

노나라 오가는 길 평탄하여

제나라 아가씨 한가로이 노니네.

 

둘이 읊고 한바탕 웃은 다음에 함께 개령동(開寧洞)으로 갔다. (한 곳이 이르자) 다북쑥이 들을 덮고 가시나무가 하늘에 치솟은 가운데 한 집이 있었는데, 작으면서도 아주 아름다웠다.

그는 여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갔다. 방안에는 이부자리와 휘장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밥상을 올리는 것도) 어젯밤 (만복사에)차려온 것과 같았다. 양생은 그곳에 사흘을 머물렀는데, 즐거움이 평상시와 같았다.

시녀는 아름다우면서도 교활하지 않았고, 그릇은 깨끗하면서도 무늬가 없었다. 인간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여인의 은근한 정에 마음이 끌려,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여인이 양생에게 말하였다.

"이곳의 사흘은 인간세상의 삼 년과 같습니다. 낭군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서 생업을 돌보십시오."

드디어 이별의 잔치를 베풀며 헤어지게 되자, 양생이 서글프게 말하였다.

"어찌 이별이 이다지도 빠르오?"

여인이 말하였다.

"다시 만나 평생의 소원을 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누추한 곳에 오시게 된 것도 반드시 묵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웃 친척들을 만나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양생이 '좋다'고 하자 곧 시녀에게 시켜, 사방의 이웃에게 알려 모이게 하였다.

첫째는 정씨이고 둘째는 오씨이며, 셋째는 김씨이고 넷째는 류씨인데, 모두 문벌이 높은 귀족집의 따님들이었다. 이 여인과는 한 마을에 사는 친척 처녀들이었다. 성품이 온화하며 풍운이 보통 아니었고, 총명하고 글도 또한 많이 알아 시를 잘 지었다.

이들이 모두 칠언절구 네 수씩을 지어 양생을 전송하였다.

정씨는 태도와 풍류가 갖추어진 여인인데, 구름같이 쪽진 머리가 귀밑을 살짝 가리고 있

 

었다. 정씨가 탄식하며 시를 읊었다.

 

봄이라 꽃피는 밤 달빛마저 고운데

내 시름 그지없이 나이조차 모르겠네.

한스러워라, 이 몸이 비익조(比翼鳥)나 된다면

푸른 하늘에서 쌍쌍이 춤추고 놀련만.

 

칠등(漆燈)엔 불빛도 없으니 밤이 얼마나 깊었는지

북두칠성 가로 비끼고 달도 반쯤 기울었네.

서글퍼라. 무덤 속을 그 누가 찾아오랴

푸른 적삼은 구겨지고 쪽진 머리도 헝클어졌네.

 

매화 지니 정다운 약속도속절없이 되어 버렸네.

봄바람 건듯 부니 모든 일이 지나갔네.

베갯머리 눈물 자국 몇 군데나 젖었던가.

산비도 무심하구나 배꽃이 뜰에 가득 떨어졌네.

 

꽃다운 청춘을 하염없이 지내려니

적막한 이 빈 산에서 잠 못 이룬 지 몇 밤이던가.

남교(藍橋)에 지나는 나그네를 님인 줄 몰랐으니

어느 해나 배항(裴航)처럼 운교(雲翹)부인을 만나려나.

오씨는 두 갈래로 땋은 머리에 가냘픈 몸매로 속에서 일어나는 정회를 걷잡지 못하며, 뒤를 이어 읊었다.

 

만복사에 향 올리고 돌아오던 길이던가

가만히 저포를 던지니 그 소원을 누가 맺어 주었나.

꽃 피는 봄날 가을 달밤에 그지없는 이 원한을

임이 주신 한 잔 술로 저근덧 녹여 보세.

복사꽃 붉은 뺨에 새벽 이슬이 젖건마는

깊은 골짜기라 한 봄 되어도 나비조차 아니 오네.

기뻐라. 이웃집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고

새 곡조를 다시 부르며 황금술잔이 오가네.

 

해마다 오는 제비는 봄바람에 춤을 추건만

내 마음 애가 끊어져 모든 일이 헛되어라.

부럽구나. 저 연꽃은 꼭지나마 나란히 하여

밤 깊어지면 한 연못에서 함께 목욕하는구나.

 

푸른 산 속에 다락이 하나 높이 솟아

연리지(連理枝)에 열린 꽃은 해마다 붉건마는

한스러워라. 우리 인생은 저 나무보다도 못하여

박명한 이 청춘에 눈물만 고였구나.

 

김씨가 얼굴빛을 가다듬고 얌전한 태도로 붓을 잡더니, 앞에 읊은 시들이 너무 음탕하다고 꾸짖으면서 말하였다.

"오늘 모임에서는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고, 이 자리의 광경만 읊으면 됩니다. 어찌 자기들의 속마음을 베풀어 우리의 절조를 잃게 하고,(저 손님으로 하여금) 우리들의 마음을 인간 세상에 전하도록 하겠습니까?"

그리고는 낭랑하게 시를 읊었다.

 

밤 깊어 오경(五更)이 되니 소쩍새가 슬피 울고

희미한 은하수는 동쪽으로 기울었네.

애끊는 옥퉁소를 다시는 불지 마오

한가한 이 풍정을 속인이 알까 걱정스럽네.

 

오정주(烏程酒)를 가득히 금술잔에 부으리다

취하도록 잡으시고 술이 많다 사양 마오.

날이 밝아 저 동풍이 사납게 불어오면

한 토막 봄날의 꿈을 내 어이하려나.

 

초록빛 소맷자락 부드럽게 드리우고

풍류 소리 들으면서 백잔 술을 드소서.

맑은 흥취 다하기 전엔 돌아가지 못하시리니

다시금 새로운 말로 새 노래를 지으소서.

구름같이 고운 머리가 티끌 된 지 몇 해던가

오늘에야 님을 만나 얼굴 한번 펴보았네.

고당(高塘)의 신기한 꿈을 자랑하지 마소서.

풍류스런 그 이야기가 인간에 전해질까 두려워라.

 

류씨는 엷게 화장하고 흰옷을 입어 아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법도가 있어 보였다. 말없이 가만있다가 (자기의 차례가 되자) 빙그레 웃으면서 시를 지어 읊었다.

 

금석같이 굳세게 정절을 지켜온 지 몇 해던가.

향그런 넋과 옥같은 얼굴이 구천에 깊이 묻혔네.

그윽한 봄밤이면 달나라 항아(姮娥)와 벗을 삼아

계수나무 꽃그늘에 외로운 잠을 즐겼다오.

우습구나. 복사와 오얏꽃은 봄바람에 못 이겨서

이리저리 나부끼다 남의 집에 떨어지네.

한평생 내 절개에 쇠파리가 없을지니

곤산옥(崑山玉) 같은 내마음에 티가 될까 두려워라.

연지도 분도 싫은데다 머리는 다북 같고

경대에는 먼지 쌓이고 거울에는 녹이 슬었네.

오늘 아침엔 다행히도 이웃 잔치에 끼였으니

머리에 꽂은 붉은 꽃이 보기만 해도 부끄러워라.

 

아가씨는 이제야 백면 낭군을 만났으니

하늘이 정하신 인연 한평생 꽃다워라.

월로가 이미 거문고와 비파 줄을 전했으니

이제부터 두 분이 양홍 맹광처럼 지내소서.

 

여인은 류씨가 읊은 시의 마지막 장을 듣고 감사하여, 앞으로 나와서 말하였다.

"저도 또한 자획은 대강 분별할 정도이니, 어찌 홀로 시를 짓지 않겠습니까?"

그리고는 칠언율시 한 편을 지어 읊었다.

 

개령동 골짜기에 봄시름을 안고서

꽃 지고 필 때마다 온갖 근심을 느꼈었네.

초협(楚峽) 구름 속에서 고운 님을 여의고는

소상강 대숲에서 눈물을 뿌렸었네.

따뜻한 날 맑은 강에 원앙은 짝을 찾고

푸른 하늘에 구름이 걷히자 비취새가 노니 누나.

님이여. 동심결(同心結)을 우리도 맺읍시다.

비단 부채처럼 맑은 가을을 원망하지 말게 하오.

 

양생도 또한 문장에 능한 사람이어서, 그들의 시법이 맑고도 운치가 높으며 음운이 맑게 울리는 것을 보고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그도 곧 즉석에서 고풍(古風) 장단편 한 장을 지어 화답하였다.

 

이 밤이 어인 밤이기에

이처럼 고운 선녀를 만났던가.

꽃 같은 얼굴은 어이 그리도 고운지

붉은 입술은 앵두 같아라.

게다가 시마저 더욱 교묘하니

易安도 마땅히 입을 다물리라.

직녀 아씨가 북 던지고 인간세계로 내려왔는가

상아가 약방아 버리고 달나라를 떠났는가.

대모(玳瑁)로 꾸민 단장이 자리를 빛내 주니

오가는 술잔 속에 잔치가 즐거워라.

운우의 즐거움이 익숙하진 못할망정

술 따르고 노래 부르며 서로들 즐겨하네.

봉래섬을 잘못 찾아든 게 도리어 기뻐라

신선세계가 여기던가, 풍류도를 만났구나.

옥잔의 맑은 술은 향그런 술통에 가득 차 있고

서뇌(瑞腦)의 고운 향내가 금사자 향로에 서려 있네.

백옥상 놓은 앞에 매운 향내 흩날리고

푸른 비단 장막에는 실바람이 살랑이는데,

님을 만나 술잔을 합하며 잔치를 베풀게 되니

하늘에 오색 구름 더욱 찬란하여라.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문소(文蕭)와 채란(彩鸞)이 만난 이야기와

장석(張碩)이 난향(蘭香) 만난 이야기를

인생이 서로 만나는 것도 반드시 인연이니

모름지기 잔을 들어 실컷 취해 보세나.

님이시여. 어찌 가벼이 말씀하시오?

가을 바람에 부채 버린다는 서운한 말씀을,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배필이 되어

꽃 피고 달 밝은 아래에서 끊임없이 노닐려오.

 

술이 다하여 헤어지게 되자, 여인이 은그릇 하나를 내어 양생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내일 저희 부모님께서 저를 위하여 보련사에서 음식을 베풀 것입니다. 당신이 저를 버리지 않으시겠다면, 보련사로 가는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저와 함께 절로 가서 부모님을 뵙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양생이 대답하였다.

"그러겠소."

(이튿날) 양생은 여인의 말대로 은그릇 하나를 들고 보련사로 가는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말 어떤 귀족의 집안에서 딸자식의 대상을 치르려고 수레와 말을 길에 늘어 세우고서 보련사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길가에서 한 서생이 은그릇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하인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아가씨 장례 때에 무덤 속에 묻은 그릇을 벌써 어떤 사람이 훔쳐 가졌습니다."

주인이 말하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인이 말하였다.

"저 서생이 가지고 있는 은그릇을 보고 한 말씀입니다."

주인이 마침내 탔던 말을 멈추고 (양생에게 그릇을 얻게 된 사연을) 물었다. 양생이 전날 약속한 그 대로 대답하였더니, (여인의) 부모가 놀라며 의아스럽게 여기다가 한참 뒤에 말하였다.

"내 슬하에 오직 딸자식 하나가 있었는데, 왜구의 난리를 만나 싸움판에서 죽었다네. 미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개령사 곁에 임시로 묻어 두고는 이래저래 미루어 오다가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다네. 오늘이 벌써 대상 날이라, (어버이된 심경에) 재나 올려 명복을 빌어 줄까 한다네. 자네가 정말 그 약속대로 하려거든, 내 딸자식을 기다리고 있다가 같이 오게나. 놀라지는 말게나."

그 귀족은 말을 마치고 먼저 (개령사로) 떠났다. 양생은 우두커니 서서 (여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약속하였던 시간이 되자 과연 한 여인이 계집종을 데리고 허리를 간들거리며 오는데,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들은 서로 기뻐하면서 손을 잡고 절로 향하였다.

여인은 절 문에 들어서자 먼저 부처에게 예를 드리고 곧 흰 휘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친척과 절의 스님들은 모두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오직 양생만이 혼자서 보았다. 그 여인이 양생에게 말하였다.

"함께 저녁이나 드시지요."

양생이 그 말을 여인의 부모에게 알리자, 여인의 부모가 시험해 보려고 같이 밥을 먹게 하였다. 그랬더니 (그 여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으면서) 오직 수저 놀리는 소리만 들렸는데, 인간이 식사하는 것과 한가지였다. 그제야 여인의 부모가 놀라 탄식하면서, 양생에게 권하여 휘장 옆에서 같이 잠자게 하였다. 한밤중에 말소리가 낭랑하게 들렸는데, 사람들이 가만히 엿들으려 하면 갑자기 그 말이 끊어졌다.

여인이 양생에게 말하였다.

"제가 법도를 어겼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 시경서경을 읽었으므로, 예의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습니다. 시경에서 말한 건상( )이얼마나 부끄럽고상서(相鼠)가 얼마나 얼굴 붉힐 만한 시인지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도 오래 다북쑥 우거진 속에 묻혀서 들판에 버림받았다가 사랑하는 마음이 한번 일어나고 보니, 끝내 걷잡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번 절에 가서 복을 빌고 부처님 앞에서 향불을 사르며 박명했던 한평생을 혼자서 탄식하다가 뜻밖에도 삼세(三世)의 인연을 만나게 되었으므로, 소박한 아내가 되어 백년의 높은 절개를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술을 빚고 옷을 기워 평생 지어미의 길을 닦으려 했었습니다만, 애닮게도 업보(業報)를 피할 수가 없어서 저승길을 떠나야 하게 되었습니다. 즐거움을 미처 다하지도 못하였는데, 슬픈 이별이 닥쳐왔습니다

 

.

이제는 제가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운우(雲雨)는 양대(陽臺)에 개고 오작(烏鵲)은 은하에 흩어질 것입니다. 이제 한번 헤어지면 뒷날을 기약하기가 어렵습니다. 헤어지려고 하니 아득하기만 해서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여인의 영혼을 전송하자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혼이 문 밖에까지 나가자 소리만 은은하게 들려 왔다.

 

저승길도 기한 있으니

슬프지만 이별이라오.

우리 님께 비오니

저버리진 마옵소서.

애닯아라 우리 부모

나의 배필을 못 지었네.

아득한 구원(九原)에서

마음에 한이 맺히겠네.

 

남은 소리가 차츰 가늘어지더니 목메어 우는 소리와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여인의 부모는 그제야 그 동안 있었던 일이 사실인 것을 알게 되어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양생도 또한 그 여인이 귀신인 것을 알고는 더욱 슬픔을 느끼게 되어, 여인의 부모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울었다.

여인의 부모가 양생에게 말하였다.

"은그릇은 자네가 쓰고 싶은 대로 맡기겠네. 또 내 딸자식 몫으로 밭 몇 마지기와 노비 몇 사람이 있으니, 자네는 이것을 신표로 하여 내 딸자식을 잊지 말게나."

이튿날 양생이 고기와 술을 마련하여 개령동 옛자취를 찾아갔더니, 과연 시체를 임시로 묻어 둔 곳이 있었다. 양생은 제물을 차려 놓고 슬피 울면서 그 앞에서 지전(紙錢)을 불사르고 정식으로 장례를 치러 준 뒤에, 제물을 지어 위로하였다.

 

아아. 영이시여. 당신은 어릴 때부터 천품이 온순하였고, 자라면서 얼굴이 말끔하였소. 자태는 서시(西施) 같았고, 문장은 숙진(淑眞)보다도 나았소. 규문(閨門) 밖에는 나가지 않으면서 가정교육을 늘 받아 왔었소. 난리를 겪으면서 정조를 지켰지만, 왜구를 만나 목숨을 잃었구려. 다북쑥 속에 몸을 내맡기고 홀로 지내면서, 꽃 피고 달 밝은 밤에는 마음이 아팠겠구려. 봄바람에 애가 끊어지면 두견새의 피울음 소리가 슬프고, 가을 서리에 쓸개가 찢어지면 버림받는 비단부채를 보며 탄식했겠구려. 지난번에 하룻밤 당신을 만나 기쁨을 얻었으니, 비록 저승과 이승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알면서도 물 만난 고기처럼 즐거움을 다하였소. 장차 백년을 함께 지내려하였으니, 하루 저녁에 슬피 헤어질 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임이여. 그대는 달나라에서 난새를 타는 선녀가 되고, 무산에 비 내리는 아가씨가 되리다. 땅이 어두워서 돌아오기도 어렵고, 하늘이 막막해서 바라보기도 어렵구려. 나는 집에 들어가도 어이없어 말도 못하고, 밖에 나간대도 아득해서 갈 곳이 없다오. 영혼을 모신 휘장을 볼 때마다 흐느껴 울고, 술을 따를 때에는 마음이 더욱 슬퍼진다오. 아리따운 그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낭랑한 그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오.

아아. 슬프구려. 그대의 성품은 총명하였고, 그대의 기상은 말쑥했었소. 몸은 비록 흩어졌다지만 혼령이야 어찌 없어지겠소? 응당 강림하여 뜰에 오르시고, 옆에 와서 슬픔을 돌보소서. 비록 사생(死生)이 다르다지만 당신이 이 글에 느낌이 있으리라 믿소.

 

장례를 치른 뒤에도 양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밭과 집을 모두 팔아 사흘 저녁이나 잇따라 재를 올렸더니, 여인이 공중에서 양생에게 말하였다.

"저는 당신의 은혜를 입어 이미 다른 나라에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저승과 이승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당신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도 이제 다시 정업을 닦아 저와 함께 윤회를 벗어나십시오."

양생은 그 뒤에 다시 장가들지 않았다.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었는데, 언제 죽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한국어 > 한국어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필 <위경천전>  (0) 2013.10.24
김시습 <이생규장전>  (0) 2013.10.24
임제 <원생몽유록>  (0) 2013.10.24
신광한 <하생기우전>  (0) 2013.10.24
김시습 <용궁부연록>  (0) 2013.10.24
권필 <주생전>  (0) 2013.10.24
박지원 <양반전>  (0) 2013.10.24
<쌍녀분기> 최치원  (0) 2013.10.24
<홍길동전> 허균, 경판24장본  (0) 2013.10.24
한용운 <님의 침묵>  (0) 2013.10.2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