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녀분기>
최치원은 자가 고운으로, 열두 살 때 서쪽으로 가 당나라에서 유학했다. 건부 갑오년에 학사 배찬이 관장하는 과거시험에 단번에 합격하여 율수현위를 제수 받았다. 늘 현의 남쪽 경계에 있는 초현관에서 노닐었다. 초현관 앞의 언덕에 옛 무덤이 있었는데, 쌍녀분이라 하는 곳으로 고금 명현들의 유람지였다. 최치원도 돌문에 시를 지었다.
뉘 집 두 여인이기에 여기에 무덤 남겼을까?
적막한 저승에서 원한의 봄은 몇 해이던가?
모습은 공중에 맴도는데 시냇가엔 달빛이
성도 이름도 묻기 어려운 무덤엔 흙먼지만 가득
꽃다운 정 꿈에라도 통할 수 있다면,
기나긴 밤 나그네를 위로할 진데,
외로운 관사에서 남녀가 서로 만나 즐긴다면,
그대들과 낙신부를 이어 부르리.
시를 다 짓고 초현관에 이르렀다. 때마침 달은 밝고 바람은 시원하여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걷다가 갑자기 한 여자를 보았다. 그녀의 용모는 얌전하게 보였으며 손에는 붉은 자루를 쥐고 있었다. 앞으로 다가와서 하는 말이 “팔낭자와 구낭자가 수재께 ‘아침에 수고롭게 특별히 오시어 아름다운 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전하라며 각기 화답시를 지어 주었으니, 삼가 명을 받들어 올립니다.”라고 했다. 공이 돌아보고 놀라 당황하며 “낭자의 성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여자가 “아침에 덤불을 헤치고 돌의 먼지를 털어 시를 지으신 곳이 바로 두 낭자의 거처입니다.”라고 하자, 공은 곧 알아차렸다. 첫 번째 자루를 열어보니 팔낭자가 수재에게 화답하는 시였다.
유혼은 이별을 한하여 외로운 무덤에 의지했지만,
붉은 얼굴 버들눈썹 오히려 청춘이네.
학을 몰고 삼신산 찾아 헤매이다가
봉황새 비녀 떨어져 구천의 티끌 되었네.
살아서는 못내 부끄러워했건만,
오늘은 낯선 사람에게 교태를 머금어 보네.
시에다 허망한 뜻 알리기가 부끄러워
하염없는 이내 마음 애만 태우네.
다음 두 번째 자루를 열어보니 구낭자의 시였다.
오다가다 그 누가 길가 무덤 돌보리오.
난경과 원앙금침, 티끌에 묻혔으니
죽고 사는 것은 천상의 명일 뿐이요
꽃을 피우고 지게 함은 세간의 봄일 뿐이로다.
매양 진녀의 속세 버림을 희구하여,
임희가 사랑하고 교태부림을 배우지 않았더니.
양왕께 운우의 정을 안기려니
천만 가지 생각에 괴롭기만 하는구나.
또 뒷면에 시가 적혀 있었다.
성과 이름 숨김을 이상히 생각 마오.
외로운 영혼 속세 사람 두려워함이라오.
한 맺힌 이내 심사 말할 터이니,
잠시나마 마음을 허락하실련지오.
공은 시를 보고 매우 기뻤다. 곧바로 그녀의 이름을 물으니, ‘취금’이라고 했다. 공은 기뻐하며 희롱하려 들자, 취금이 화를 내며 “수재께서는 마땅히 회답을 써 주셔야지, 공연히 사람을 괴롭히려 드십니까?”라고 말했다. 최치원은 이에 시를 지어 취금에게 주었다.
옛 무덤에 우연히 썼던 하찮은 시
어찌 선녀가 속세를 방문하길 바랬던가?
파란 옷깃에도 꽃다운 아름다움 띠었으니
붉은 소매에는 응당 옥수 같은 청춘 머금었으리.
성과 이름 숨겨 속세의 객을 속이더니,
교묘하게 시를 지어 시인을 괴롭히네.
오로지 함께 만나고파 애태우나니,
빌고 비나이다. 천심만령이여!
이어서 끝에다 또 시를 지었다.
파랑새 괜스레 사유를 알려주니
잠깐 생각에도 눈물 줄기 끝이 없네.
오늘밤 선녀를 만나지 못하면,
여생을 버려 땅 속에라도 들어가 찾아 헤매리.
취금이 시를 얻어 돌아가니, 그 빠르기가 회오리바람 같았다. 최치원은 홀로 서서 애달파 하고 있는데, 오래도록 아무런 동정이 없자, 단가를 불렀다. 노래가 끝날 즈음에, 갑자기 향기가 풍기더니 한참 있다가 두 여자가 나란히 나타났다. 한 쌍의 맑은 구슬이고 두 송이 상서로운 연꽃이었다. 최치원은 놀랍고 기뻐 꿈인 줄 알았다. 절을 하며 말을 건넸다. “저는 해도의 보잘것없는 서생이며 속세에서는 말단 벼슬아치이오니, 어찌 선녀께서 외람되이 풍류를 함께 하기를 기대하겠습니까? 무심코 장난삼아 지었던 것인데, 꽃다운 발걸음을 내려 밟게 되었습니다.” 두 여자는 미소를 짓고 아무 말이 없었다. 최치원은 다음 시를 지었다.
다행히 아름다운 밤에 잠시나마 만났건만,
어떻다 말도 없이 저문 봄을 보낼건가?
원래 진녀인 줄 알았지,
본디 식부인인 줄은 몰랐다네.
자줏빛 치마를 입은 여자가 화를 내면서 “처음부터 농담이 지나치고 경멸까지 하는군요. 식부인은 일찍 두 남편을 따랐지만, 천첩은 한 남편도 섬기지 않았답니다.”라고 말했다. 공이 “부인은 말씀을 안 하시면 몰라도 하시면 맞는 말씀만 하시는군요.”라고 농으로 받았다. 두 여자는 모두 웃었다. 최치원이 곧 “낭자들께서는 어디 살고 계시며, 어느 집 사람입니까?”라고 물었다. 자줏빛 치마를 입은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와 동생은 율수현 초성향 장씨의 두 딸입니다. 선친께서는 현의 관리도 하지 않고 다만 마을의 호족으로, 그 부유함은 동산과 같았으며 그 사치스러움은 금곡원과 같았습니다. 제 나이 열여덟 그리고 동생 나이 열여섯 살이 되자, 부모님께서는 혼사를 의논하셨는데, 저는 소금장수에게 청혼하셨고 동생은 차(茶)장수에게 시집보내기로 하셨습니다. 우리 자매는 매번 결혼을 말할 적마다 마음속으로 불만이 계속되어 결국 그 맺힌 울분을 펴지 못해 차례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선생께서는 의심하지 마시기를 바라옵니다.”
최치원은 “옥 같은 소리가 분명히 들리는데 어찌 의심을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또 이어서 두 여자에게 물었다. “무덤에 의지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초현관이 예서 멀지 않으니, 영웅들과 만났다면 어찌해서 미담이 없었겠습니까?” 붉은 소매의 옷을 입은 여자가 “지금까지 왕래한 자는 모두 비천한 자들이었는데, 오늘에야 다행히 오산의 뛰어난 정기를 받으신 수재를 만나 함께 현묘한 이치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최치원은 술을 가져다 놓고 두 여자에게 “세속의 음식을 세상 바깥의 사람에게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자, 자줏빛 치마를 입은 여자가 “먹지 않고 마시지 않아도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뛰어난 용모를 지닌 분을 만났고 좋은 술을 대하니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곧이어 술을 마시며 각기 시를 지는데, 모두가 맑고 뛰어나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구절이었다. 때마침 달은 밝아 낮과 같았고 바람은 시원하여 가을과 같았다. 언니 되는 여자가 ‘달이라는 제목으로 풍(風)자 운을 짓자’고 제의했다. 그래서 최치원이 먼저 기련을 띄웠다.
금빛 파도 눈에 가득 공중에 넘치니
천리 수심은 어디서나 같지 않으리.
팔낭자가 이었다.
옛길 잃지 않은 달빛은 흐르고
봄바람 불지 않아도 계수 꽃은 핀다네.
구낭자가 이었다.
삼경 넘어 달빛이 더욱 빛날 즈음
이별의 애달픈 심사 저 달 속에 남아있네.
최치원이 다시 이어 받았다.
흰 빛깔 펼쳐질 땐 비단 장막 펼치는 듯,
홀 모양처럼 비칠 땐 옥 창문 꿰뚫는 듯,
팔낭자가 다시 이어 받았다.
인간을 멀리 이별하니 창자가 끊어질 듯,
황천에 외로이 누웠으니 한은 끝이 없네.
구낭자가 다시 이어 받았다.
항아의 빈틈없는 생각 부러워하노니,
능히 향각을 버리고 선궁에 이르렀다네.
공은 더욱 감탄하여 “이런 자리에 생황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자가 없으니, 즐거움을 다 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붉은 소매의 옷을 입은 여자가 취금을 돌아보며 말했다. “현악기는 관악기만 못하고 관악기는 사람의 육성만 못한 것인데, 이 여종 아이가 노래를 잘 부른답니다.”라고 말하더니, ‘소충정’이란 곡을 부르도록 하였다. 취금이 옷깃을 여미고 노래를 부르는데, 그 청아함이 정말 뛰어났다.
세 사람은 반쯤 술이 취했다. 최치원이 두 여자를 희롱하며 말했다.
“일찍이 노충은 사냥하다 갑자기 좋은 인연을 만났고, 완조는 신선을 찾다 아름다운 배필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꽃다운 정을 허락하신다면 좋은 인연이 이뤄 봅시다.”
두 여자는 “우제께서 임금이 되심에 아황과 여영 두 여인이 모시었고, 주량이 장수가 됨에 두 여자가 따랐습니다. 그 옛날에도 그랬는데 지금 어찌 못하겠습니까?”라며 허락했다. 최치원은 뜻밖에 만난 기쁨에 깨끗한 베개 세 개를 늘어놓고 새 이불 하나를 폈다. 세 사람은 한 이불 속에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정을 나누었다. 그 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최치원이 두 여자를 놀리며 말했다.
“규중을 향하여 황공의 사위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무덤가에 와서 진씨의 여종을 껴안았으니,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네.”
언니가 시를 지어 대답했다.
그대 말 들어보니 어질지 못함을 알겠네.
응당 습관에 따라 여종과 자야겠지.
동생이 끝을 이었다.
공연히 바람둥이에게 시집갔다가
경박한 어거지로 지상선인 욕먹이네.
공이 화답시를 지었다.
오백 년 만에 처음으로 어진이 만나서
오늘밤 함께 자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네.
꽃다운 마음이여! 광객과 친함을 괴이하게 생각 마오.
일찍이 봄바람을 향해 귀양 온 신선이길 바랬소.
조금 뒤에 달이 지고 닭이 울자, 두 여자는 놀라며 공에게 말했다.
“즐거움이 극에 차면 슬픔이 오고, 이별은 길고 만남은 짧습니다. 이것은 인간 세상에서 귀천을 막론하고 똑같은 슬픔인데, 하물며 살고 죽는 길이 다르고 오르고 잠기는 길이 다른 곳에 있어서랴. 매양 환한 낮을 꺼리어 꽃다운 때를 헛되이 보내오니, 다만 하룻밤을 모시게 된 즐거움으로 인해 이로부터 천년의 한이 되겠습니다. 처음엔 동침의 행복이 있음을 기뻐하였지만, 갑자기 파경하여 기약 없음을 한탄합니다.”
두 여자는 각기 시를 지어 주었다.
북두성 한 바퀴 돌고 물시계 소리 드문데,
떠나는 인사하려니 눈물만 흐르네.
이로부터 천년의 한을 맺었으니,
밤중의 기쁨 다시 찾을 길 없네.
기운 달 창에 비치니 붉은 얼굴 싸늘해지고,
새벽바람 소매에 나부껴 파란 눈썹 찌푸리네.
그대와 하직하는 걸음걸음 창자가 끊어지는 듯,
헤어진 뒤에는 운우의 꿈조차 꾸기 어려우리.
최치원은 시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두 여자는 최치원에게 “다른 날 이 곳을 다시 지나시게 된다면 황폐한 무덤을 고치고 쓸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작별 인사를 마치자, 곧 사라져 버렸다.
다음날 아침, 최치원은 무덤가에 가서 방황하며 읊조리다가 더욱 감탄하여 긴 노래를 지어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풀과 먼지 덮인 어두컴컴한 두 여자의 무덤
예부터 명승지라 누가 들었던가?
넓은 들에는 천추의 달만이 한스럽고,
무산에는 공연히 두 조각의 구름이 걸려 있네.
웅재로서 먼 타국의 관리됨을 스스로 한하고,
우연히 외로운 초현관에 와 조용한 곳을 찾아
장난 삼아 석문에다 지었던 시구(詩句)
감동한 선녀 밤에 이르렀네.
붉은 소매의 비단 옷, 자줏빛 치마
앉으니 난향과 사향이 코를 찌르네.
파란 눈썹 붉은 뺨은 속세를 뛰어넘고
술 마시는 태도와 시정(詩情) 역시 출중하네.
지는 꽃을 마주 보며 좋은 술을 기울이고,
쌍쌍이 추는 예쁜 춤에 섬섬옥수 드러나네.
미친 듯한 이 마음 산란하여 부끄러움도 잊고
꽃다운 뜻 허락할지 물어보았네.
오래도록 멍한 표정 짓던 미인의 얼굴빛
반은 웃는 듯 반은 우는 듯하네.
친해지자 마음은 불과 같고,
붉은 얼굴 차라리 진흙처럼 취하고 싶네.
아름다운 노래 부르며 서로 합하니,
꽃다운 밤의 좋은 만남 전생에서 정해진 운명일세.
사녀의 청담 비로소 들었으며,
반희의 우아한 시 역시 보았네.
정답게 처음으로 친함을 구하니,
바로 복숭아꽃 오얏꽃 피는 봄이로세.
밝은 달을 비추어 금침의 정 다하고,
향기로운 바람은 비단 같은 몸 끌어당기네.
비단 금침에서 나눈 그윽한 즐거움 다하지 못한 채
벌써 이별의 수심이 찾아왔나니.
몇마디 안되는 나머지 노래에 외로운 혼 끊는데,
가물거리는 등잔불이 두 눈의 눈물 비추네.
날이 밝자 난새와 학처럼 동서로 나눠지니,
홀로 앉아 생각하니 꿈을 꾸고 있는 듯.
다시 생각해 보고 꿈이 아닌 듯하여,
수심에 겨워 바라본 푸른 하늘에 구름만 떠가네.
말인 양 길게 흐느끼며 갔던 길 바라보며,
미친 듯 버려진 무덤 다시 찾아보노라.
떨어진 꽃 밟았던 비단버선 만날 수 없고,
꽃가지만 아침이슬에 울고 있을 뿐,
애간장이 끊어질 듯, 자꾸자꾸 돌아봐도
적막한 황천문 그 누가 열어주리?
수레 머물고 바라볼 땐 눈물이 한이 없고,
채찍 걸어두고 읊조리는 곳엔 슬픔이 넘쳐 있네.
늦은 봄, 햇살에 버들 꽃 요란하게 빠른 바람 맞이하네.
나그네 수심으로 늘 봄 경치 원망하거니,
더구나 이별의 심정 생각나는 꽃다운 자태
인간사 대단한 건 수심이라
출세길 달리자 미망에 빠졌네.
동작대 덮은 풀은 천고의 한이라.
금곡에 핀 꽃은 하루의 봄일세.
완조와 유신은 보통 인물이요,
진시황과 한무제는 선골이 아닐세.
당시의 가회를 따를 길 막연한데,
후대에 이름 남기니 단지 슬픔 뿐인 것을
유유히 왔다가 홀연히 가나니,
운우가 무상주임을 알겠네.
이곳에 와 두 여자를 만남이
멀리 양왕의 운우지몽과 흡사하나니.
대장부여! 대장부여!
장대한 기백으로 아녀의 한 반드시 제거하여
여우같은 요녀를 심사에 두지 마시게.
후에 최치원은 과거에 급제하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노상에서 시를 지었다.
뜬세상의 영화는 꿈속의 꿈이거니,
흰 구름 깊은 곳에 몸 편히 함만 못하리.
얼마 후, 물러나 은거하더니 산림강해에서 중을 찾으며 작은 집 짓고 석대를 쌓더니, 문적에 파묻혀 풍월을 읊조리며 한가로이 소요하며 지냈다. 남산 청량사, 함포현 월영대, 지리산 쌍계사, 석남사, 묵천석대에 심어져 지금도 남아 있는 모란 등은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최후로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여 형인 고승 현준, 남악의 정현법사와 함께 경론의 심오한 이치를 구명하였으며 허정함에 마음을 두고 여생을 마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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