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주생전]
주생의 이름은 회(檜)이고, 자는 직경(直卿)이며, 호는 매천(梅川)이라 했다. 주생의 집안은 대대로 전당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의 부친이 촉주의 별가(別駕)란 벼슬살이를 하면서 촉에서 살게 되었다. 주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영민했다. 시도 잘 지었다. 나이 열 여덟에 태학생이 되었고, 동배들의 추앙을 받는 바가 되었다. 주생 자신도 재주와 학문이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태학에 다닌 지도 수년이 흘렀다. 계속 과거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을 했다. 이에 주생은, 탄식하며 말했다.
「이 세상의 인생이란 마치 티끌이 연약한 풀잎에 깃들여 있는 것과도 같은데, 어찌 명예에 얽매여 더러운 속세에서 허덕이며 아까운 청춘을 보낼까보냐.」
이때부터 주생은 과거에 대한 뜻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 대신 장사에 뜻을 두었다. 주생이 재산을 헤아려 보니 수천 냥이나 되었다. 그 중 반으로는 배를 구입했다. 강호를 오가며 남은 돈으로 잡화 장사를 시작했다. 잇속이 있어 스스로 생활을 꾸려 갈 수 있었다. 이래서 아침에는 오땅에 있었고 저녁에는 촉땅에 있었다. 그는 장사에만 굳이 구애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녔다.
어느 날이었다. 악양성 밖에 배를 매어 두고, 오래 전부터 친히 지내는 나생을 찾았다. 그 또한 뛰어난 선비였다. 나생은 주생을 반갑게 맞이했다. 술을 마시며 서로 즐겼다. 주생은 취하는 줄도 모르게 대취하여 배로 돌아왔다. 날은 벌써 땅거미가 짙게 깔렸다. 둥근 달이 떠올랐다. 주생은 배를 강 가운데 띄워 놓고 돛대에 기댄 채, 어느 새 곤하게 잠이 들어 버렸다. 배는 마파람을 받아 쏜살같이 흘러갔다.
주생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뿌연 안개 속에서 절간의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달은 서쪽 하늘에 걸려 있었다. 강 양쪽 언덕에는 푸른 나무들만이 희미하게 보였고, 새벽빛은 아직 어둑어둑했다. 나무 그늘 사이로 초롱불빛이 붉은 난간을 푸른 주렴 사이로 은은히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어딘가 물으니 전당이라고 했다. 즉흥시 한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악양성 밖 난간을 의지한 몸,
하룻밤 바람에 흘러 꿈나라로 들었네.
두견새 두어 소리 봄달이 밝고,
문득 놀라 깨니 몸은 어느덧 전당에 와 있네.
아침이 밝았다. 주생은 고향 친구들을 찾아 나섰다. 그들 태반은 벌써 세상을 떠나 버린 뒤였다. 주생은 시구를 읊조리며 배회했다. 차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기생 배도(俳桃)를 만났다. 주생과는 어릴 적 소꿉동무였다. 그녀는 재주나 미모에 있어 전당에서는 제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배랑(俳娘)이라 불렀다. 배도는 주생을 집으로 모셨다. 서로 마주 대하니 몹시 기뻤다. 주생은 시 한 수를 지어 그녀에게 주었다.
하늘가 타향에서 몇 해나 지냈던가,
만리길 돌아오니 일마다 다르도다.
두추(杜秋)의 높은 명성 예나 다름없고,
작은 다락 구슬발은 석양에 빛나누나.
배도는 시를 읽고 몹시 놀라 말했다.
「낭군의 재주가 이다지도 훌륭하니, 모든 사람에게 굽힐 데가 없구료. 어찌하여 부평초처럼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시옵니까. 그래 장가는 드시었나요.」
「아직도 장가를 못 갔소.」
배도가 웃으며 말했다.
「제 소원이옵니다. 낭군님은 이제 배로 돌아가지 마시고 저희 집에 머물러 계시와요. 그러면 낭군님을 위해 좋은 배필을 마련해드리겠사옵니다.」
배도는 주생에게 은근히 마음을 둔 터였다. 주생도 배도의 아름다운 자태에 은근히 도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생은 웃으면서 사양했다.
「내 어찌 감히 바랄 수가 있겠소.」
이렇듯 즐겁게 노는 동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배도는 어린 계집종을 불러 주생을 별실로 모셔 편히 쉬게 했다. 침실 벽에는 절구 한 수가 걸려 있었다. 시의 내용이 생소한 것이었다. 주생이 계집종에게 물었다.
「이 시는 누가 지은 것이냐.」
「주인아씨가 지은 것이옵니다.」
그 시는 이러했다.
비파로 상사곡일랑 타지를 마오,
곡조 높아지면 이 가슴 더욱 태우리라.
꽃은 피어 만발한데 임은 없으니,
오는 봄 애태우다 지샌 밤이 몇이던가.
주생은 벌써 배도의 곱디고운 자태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런데다 그녀의 시를 읽으니 한층 더 정이 쏠렸고, 마음은 불같이 타올라 만가지 생각이 다 사라져 버렸다. 그는 이 시의 대구를 지어 그녀의 뜻을 떠 보려고 했다. 아무리 고심했으나 좀체 시를 이룰 수가 없었다.
밤은 깊어만 갔다. 달빛은 뜰에 가득했고 꽃그림자는 운치를 도왔다. 주생은 이리저리 배회했다. 홀연 문 밖에서 얘기 소리, 말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주생은 매우 의심쩍었다. 그 연유를 알 수 없었다.
배도의 방은 그리 멀지 않았다. 주생은 배도의 방을 살폈다. 창가에선 촛불이 환히 비쳐 나왔다. 주생은 몰래 다가가 안을 엿보았다. 배도는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채운전(彩雲牋)을 펴놓고 「접연화(蝶戀花)」란 사(詞)를 草하고 있었다. 단지 전첩(前疊)만 지었을 뿐, 후첩은 아직 짓지 못하였다. 이에 주생은 창문을 열면서 말했다.
「주인 아가씨의 사를 이 나그네가 채워드려도 좋겠소.」
배도는 짐짓 화난 듯이 말했다.
「미친 손이 어찌하여 여기까지 오셨나요.」
「내가 미친 것이 아니오. 주인 아가씨가 이 나그네를 미치게 할 따름이오.」
배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주생으로 하여금 그 사를 완성하게 했다.
깊고 깊은 원당에 춘정 설레고,
달빛은 꽃가지에 가득도 한데,
향로의 연기, 향기도 높구나.
창 안의 고운 여인 근심으로 겉늙어,
꿈마저 잃고선 방초 위를 헤매누나.
선경에 잘못 든 번천이
방초 찾아 노닐 줄 뉘 알리.
잠 깨니 새들은 가지에서 지저귀고,
푸른 발엔 그림자도 뵈지 않는데,
붉은 난간엔 날이 이미 밝구나.
주생은 사를 다 짓자, 배도는 그때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약옥강(藥玉舡) 술잔에다 서하주(瑞霞酒)를 따라 권했다. 주생은 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배도가 아무리 권해도 사양했다. 그녀는 주생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처연히 말했다.
「저의 조상은 호족(豪族)이었지요. 조부께서는 천주(泉州)의 시박사(市舶司) 벼슬을 지내시다가 죄를 지어 서인으로 쫓겨났습니다. 그 후부터는 빈곤하여 다시는 재기할 수 없었어요. 더욱이 저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다른 사람 손에서 자라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절개를 지켜 깨끗이 간직하려 했지만, 이미 기생의 명부에 올라 부득이 사람들과 얼려 술 마시고 놀게 됐답니다. 저는 늘 한가한 시간이면 꽃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고, 달을 바라보며 넋을 잃곤 했어요. 이제 낭군님을 뵈오니, 풍채가 의젓하시고 거동이 활달하며, 재주가 빼어나고 생각이 깊사옵니다. 제 비록 몸은 천하오나 침석(沈席)에 모시고 건즐(巾櫛) 받들기를 원하옵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낭군님이 후일에 입신 출세하셔서 속히 높은 신분이 되시어, 저를 기생의 명부에서 빼 주시와 선조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해주시온다면 하는 것뿐이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낭군님이 저를 버리셔 도중에 헤어지더라도 그 은혜를 잊지 않겠사오며, 조금도 원망하지 않겠사옵니다.」
배도는 말을 마치고 비오듯 눈물을 흘렸다. 주생은 그녀의 하소연에 크게 감동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씻어 주며 말했다.
「그것은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오. 그대가 말하지 않더라도 내 어찌 생각이 없을까.」
배도는 눈물을 거두고 안색을 달리하여 말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여자는 행실이 좋아도(女也不爽)이요, 남자가 두 마음을 먹는다네(士貳其行)이라 하지 않았어요. 낭군님은 이익(李益)과 곽소옥(藿小玉)의 일을 못 보셨는가요. 낭군님이 저를 멀리하시거나 버리지 않으시겠다 하오면 맹세의 말씀을 해주시와요.」
배도는 노나라에서 나는 고운 명주 한 자락을 꺼내어 주생에게 주었다. 주생은 즉석에서 붓을 들었다.
푸른 산은 언제나 푸르고,
푸른 나무는 길이 남도다.
그대 날 믿지 못하겠다면,
밝은 달이 대낮에 떠 있으리로다.
주생이 쓰기를 마치자, 그녀는 정성껏 봉해서 치마피 속에다 간직했다.
이날밤 그들은 고당부(高唐賦)를 읊으며 맘껏 즐겼다. 그것은 김생(金生)과 취취(翠翠)며 위랑(魏郞)과 빙빙(娉娉)의 재미에 견줄 바 아니었다.
이튿날이었다. 주생은 지난밤에 들었던 사람의 말소리며 말 울음소리에 대해 물었다.
배도가 대답했다.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붉은 대문을 한 집이 물가에 면해 있사옵니다. 그것은 죽은 노승상의 댁이옵니다. 승상은 이미 돌아가시고 노부인이 일남 일녀를 거느리고 홀로 살고 있습니다. 아직 아들딸을 성사도 시키지 않고 날마다 노래하며 춤추는 것으로 일을 삼고 있답니다. 지난밤에도 사람과 말을 보내어 저를 데리러 왔었어요. 그러하오나 낭군님이 와 계시어 병을 핑계 대고 거절하였습니다.」
이날 해질 무렵 승상부인은 배도를 데리러 사람을 보내왔다. 그녀는 또 다시 거절할 수는 없었다. 주생은 나서는 배도를 문 밖까지 나가 배웅하면서,
「밤을 새우지 말고 곧 돌아오도록 하오.」
하고 신신당부했다. 배도는 말을 타고 가버렸다.
그 모습은 산뜻한 난새(鸞鳥) 같고, 말은 나는 용과도 같이 곱게 버들 숲을 스치면서 염염히 사라졌다.
주생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곧 뒤따라 달려갔다. 용금문을 나섰다. 왼편으로 돌아섰다. 수홍교에 이르렀다. 웅장한 저택이 구름에 닿을 듯이 우뚝 서 있었다. 주생이 곧 이 집이 물가에 면해 잇는 붉은 대문집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집은 공중에 걸려 있는 것만 같았다. 이따금 음악소리가 뚝 그치면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밖에까지 들려왔다.
주생은 다리 위에서 방황했다. 고풍의 시 한 수를 지어 기둥에 적어 두었다.
버들숲 너머 잔잔한 호수엔 누각이 걸려 있고,
붉은 용마루 푸른 기와엔 청춘이 비치도다.
웃음과 말소리 향풍 타고 들려오건만,
꽃 건너 누각의 사람은 보이질 않네.
꽃 속을 오가는 한 쌍의 제비 부럽기만 한데,
정은 임의로 주렴 속을 날아드네.
이리저리 배회해도 발길을 돌릴 수 없어,
낙조 실은 가는 물결 나그네 시름을 더하누나.
주생은 방황하는 사이에 어느덧 석양의 놀이 짙어졌다. 어둠이 밀려왔다. 이때 여러 무리의 여자들이 붉은 대문에서 말을 타고 나왔다. 금안(金鞍)과 옥륵(玉勒)의 광채가 휘황하게 비쳤다. 주생은 배도가 이 무리 속에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는 길가의 빈집으로 숨어들어 지나는 십여 인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배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매우 의심쩍었다. 다리 위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날은 이미 소와 말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이에 주생은 곧장 붉은 대문으로 들어갔다. 사람은 전혀 얼씬거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누각 밑으로 가 보았다. 역시 사람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주생은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었다. 달은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누각의 북쪽으로 연못이 훤히 보였다. 수면 위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 있었다. 꽃밭 사이로는 길이 굽이굽이 나 있었다. 그는 이 길을 따라 슬금슬금 걸어갔다. 꽃밭이 끝나자 집이 있었다. 그는 계단을 따라 서쪽으로 수십보 꺾어 들었다. 멀리 포도가(葡萄街) 아래 한 채의 집이 보였다. 규모는 작으나 아담했다. 사창은 절반이나 열려 있었고 촛불이 높이 타오르고 있었다. 촛불 그림자 밑으로는 붉은 치마와 푸른 옷소매가 나풀거리는데, 영락없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주생은 몸을 숨기며 다가갔다. 숨마저 죽이고 몰래 엿봤다. 금빛 병풍이며 비단요가 눈을 부시게 했다. 나이는 오십 줄이나 됐을까, 조용히 뒤돌아보는데 여유가 작작했고 매우 아름다웠다. 그 옆에는 열 너덧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앉아 있었다. 머리채는 곱게 뒤로 땋아 내렸고 얼굴은 어여쁘기 그지없었다. 소녀의 맑은 눈이 살짝 옆을 흘기는 모습은 흐르는 맑은 물결 위에 가을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웃을 때면 애교가 넘쳤고, 그 입 모양은 정녕 봄꽃이 아침 이슬을 함빡 머금은 듯했다. 이들 사이에 앉아 있는 배도는 그들에 비한다면 봉황과 까마귀, 구슬과 조약돌 격이었다.
주생의 넋은 구름밖에 나앉고 마음은 허공을 맴돌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미친 듯이 소리치며 뛰어들고픈 심정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술이 한 순배 돌아갔다. 배도는 자리에서 물러나 돌아가려고 했다. 부인이 끝내 말리려 했으나 그녀는 간절히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부인이 말했다.
「평소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어찌 이리도 서두는가. 정든 사람과 약속이라도 있단 말인가.」
배도는 옷깃을 단정히 하고,
「마님께서 하문하시니, 어찌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주생과 인연을 맺은 내력을 자세히 아뢰었다. 승상 부인이 미처 말할 사이도 없이, 소녀가 미소 짓고 배도를 흘겨보며 말했다.
「왜 좀더 진작 말하지 않았어요. 하마터면 하룻밤 즐거운 모임을 놓칠 뻔했군요.」
주생은 재빨리 그 집을 빠져 나왔다. 한 발 앞서 배도의 집에 다다랐다.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코까지 드르렁 골면서 자는 체했다. 배도는 이내 뒤따라왔다. 주생이 누워 자는 것을 보고는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낭군님은 지금 무슨 꿈을 꾸고 계시옵니까.」
주생은 제멋대로 읊어 댔다.
꿈결에 요대를 오색 구름에 들어,
꽃무늬 수놓은 장막 안에서 선아를 꿈꾸었도다.
배도는 몹시 불쾌해 하며 힐문했다.
「소위 선아라는 것은 도대체 누구지요.」
주생은 말로써 대답할 수 없어 다시 시로써 응답했다.
꿈 깨어 보니 기쁘다. 선아가 예 있네.
만당한 이 그윽한 정취를 어이하리.
주생은 배도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대가 내 선아 아닌가.」
하니, 배도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낭군님은 저의 선랑(仙郞)이군요.」
이 뒤부터 서로 선아(仙娥)․선랑(仙郞)으로 부르게 되었다. 주생이 배도에게 늦게 온 사연을 물으니, 배도가 대답했다.
「연희가 파한 후 다른 기생들은 모두 돌아가게 하였으나 유독 저만 남게 했나이다. 저를 따로 선화의 거소에다 불러 다시 조촐한 술자리를 벌여 놓고 붙들었습니다.」
주생이 자세히 유도해 물어 보니 배도가 대답했다.
「선화의 자는 방경(芳卿)이고 나이는 열다섯입니다. 용모가 빼어나 세속 사람 같지 않으며, 사곡을 잘 지을 뿐만 아니라 자수도 잘 놓아 저 같은 것은 감히 댈 수도 없어요. 어제는 풍입송(風入松)의 사를 짓고, 거기에 맞춰 금현(琴絃)을 뜯고자 했어요. 제가 음률을 안다고 머물게 하고서는 그 곳을 노래하게 했어요.」
주생이 다시,
「그럼 그 사는 어떤 것인가.」
하고 물으니, 배도는 소리 내어 쭉 읊었다.
옥창에 꽃 피고 봄날은 더디기만 한데,
집안은 고요하고 주렴이 드리웠네.
모랫가의 예쁜 오리는 석양을 즐기고,
쌍쌍이 짝 지어 봄 못에서 멱 감으니 부럽기만 하구나.
버들숲 안개는 가벼이 엉겼고,
휘늘어진 가지마다 안개 속에 간들간들.
꽃다운 님은 잠 깨어 난간에 기댔는데,
만면엔 수심이 가득하구나.
제비는 집지어 알을 품고,
꾀꼬리는 때 가는 줄 모르고 지저귀는데,
봄날의 미색은 꿈결같이 시드니 한스럽기만 하구나.
비파 잡아 가볍게 튕기니,
곡 중의 깊은 원한을 그 뉘라서 알리오.
배도가 한 귀를 읊을 때마다 주생은 은근히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짐짓 말했다.
「이 사곡에는 규방의 춘회(春懷)가 남김없이 발휘되었구료. 소약난(蘇若蘭) 정도의 뛰어난 솜씨가 아니면 그만한 경지에 이르기는 좀 힘들 것 같소. 그러나 나의 선아가 꽃을 다듬고 옥을 깎는 재주만은 못하오.」
주생은 선화를 본 후로 배도에 대한 정이 엷어졌다. 응수할 때만은 억지로 웃음을 짓고 즐거운 체했으나 마음엔 오직 선화 생각뿐이었다.
하루는 승상부인이 어린 아들 국영(國英)을 불러 말했다.
「네 나이 벌써 열 둘이 아니냐. 아직도 취학을 못하고 있으니, 후일 성년이 되면 어떻게 자립하겠느냐. 내 들은 바로는 배도의 남편인 주생은 글을 잘하는 선비라고 한다. 네 가서 배우기를 청하는 것이 좋겠구나.」
부인의 가법은 매우 엄했다. 국영은 이 말을 어길 수 없었다. 그 날로 책을 챙겨 주생에게 갔다. 주생은 마음속으로 「이제는 됐구나」하고 은근히 기뻐했다. 그러나 거듭 사양하다가 마지못한 체하면서 허락했다.
어느 날 주생은 배도가 출타한 틈을 타 국영에게 조용히 말했다.
「네 오가면서 글을 배우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 아니겠느냐. 네 집에 빈방이라도 있다면 내가 너의 집으로 옮겨갔으면 한다. 너는 왕래하는 불편을 덜 것이요, 나는 너를 가르치는 데 전력을 다할 수 있을 텐데.」
국영은 넙죽 절을 하면서,
「그러하오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가 어머님께 말씀드려 그 날로 주생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였다. 배도는 외출했다 돌아와 몹시 놀라며 말했다.
「아마도 선랑께서는 딴 마음이 있으신가 보군요. 왜 저를 버리시고 다른 곳으로 가십니까.」
「내 듣건대 승상댁에는 삼만축(三萬軸)의 장서가 있다 하오. 부인은 선공(先公)의 유품이라 함부로 내고 들이는 것을 싫어한다지 않소. 그래서 그 집에 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책들을 읽어보려는 욕심으로 그러는 거요.」
배도는,
「낭군님께서 학문에 정진하시는 것은 저의 복입니다.」
하고 말했다.
주생은 승상댁으로 옮겨갔다. 낮이면 국영이와 같이 있고, 저녁이면 집안의 문이란 문은 빈틈없이 잠가 버리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갖은 궁리를 다하는 동안 어느덧 열흘이 지났다. 문득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선화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봄이 다 가도록 만나지도 못했구나. 황하의 물 맑기를 기다린다면 몇 해나 기다려야 할지. 차라리 어둔 밤에 선화 방으로 뛰어드는 게 낫겠다. 일이 성공하면 귀한 몸이 될 것이요, 실패로 돌아가면 죽음을 당한다 해도 좋다.」
이날 저녁따라 달이 없었다. 주생은 여러 겹의 담을 뛰어넘어 선화의 방 앞에 이르렀다. 복도에는 구부러진 큰 기둥이 있는데 휘장이 겹겹이 드리워 있었다. 선화는 얼마 동안 혼자만이 촛불을 밝히고 곡을 뜯고 있었다.
주생은 기둥 사이에 바짝 엎드려 그 뜯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뜯기를 다한 선화는 소자첨(蘇子瞻)의 하신랑사(賀新郞詞)를 작은 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주렴 밖 그 누가 와 있어 수창을 두드리니,
선경에 노니는 이 꿈을 깨웠네.
아, 이제 보니 그대는 임이 아니고,
바람이 불어와 대를 쳤구나.
이것을 듣자, 주생은 주렴 밖에서 작은 소리로 읊었다.
바람이 불어와 대를 친다 마오.
바로 그리운 임 여기 왔도다.
선화가 못 들은 척했다. 곧 촛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주생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함께 잠자리에 파고들었다. 선화는 나이가 어린 데다 약질이었다. 정사를 견뎌내지 못했다. 그러나 엷은 구름과 가는 비처럼 버들과 어린 꽃처럼 교태로왔다. 울다가는 부드럽게 속삭였고, 살며시 미소 짓다가는 가볍게 찡그리기도 했다.
주생은 벌이 꽃을 찾아 날 듯 나비가 꽃가루를 그리워하듯 매혹되었다. 정신은 한없이 무르녹았다.
어느덧 날은 밝아왔다. 난간 앞 꽃나무 가지에 앉은 부엉이 울음소리를 문득 들었다. 주생은 깜짝 놀랐다. 방을 급히 나갔다. 집과 연못은 고요했고 새벽 안개는 몽롱했다. 선화는 주생을 보내느라고 방문을 나섰다가 문을 닫고 들어가며 말했다.
「이제 간 후로는 다시는 오지를 마셔요. 이 비밀이 새나가 누설된다면 死生이 걱정되옵니다.」
주생은 기가 막혔다. 목이 메어 급히 달려들며 말했다.
「이제 겨우 좋은 인연을 이루었는데 어찌 이렇게도 박대를 하는 거요.」
선화는 방긋 미소 지으면서,
「아까 말은 농담이어요.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옵고 저녁으로 만나도록 하시어요.」
하고 말했다. 주생은 연신 「응응」하면서 급히 달려나갔다.
선화는 방으로 들어오자 조하문효난(早夏間曉鶯) 시를 일절 지어 창밖에 걸었다.
비 내렸다 갠 날은 막막하고 음산한데,
푸른 버들은 그림 같고 풀은 연기만 같구나.
봄날의 수심은 봄따라 가지 않고,
새벽 꾀꼬리를 따라 베갯머리로 날아드누나.
다음날 저녁이었다. 주생은 또 선화를 찾아갔다. 갑자기 담 밑 나무 사이에서 아련하게 신발 끄는 소리가 났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들켰나 싶어 달아나려 했다. 신을 끌던 사람이 청매를 던져 주생의 등을 맞혔다. 그는 피할 곳이 없어 몹시 당황했다. 수풀 속에 납작 엎드렸다. 그런데 신 끌던 사람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주랑 놀라지 말아요. 앵앵이 여기 있어요.」
그제서야 주생은 선화가 한 짓인 줄 알았다. 일어서서 선화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왜 이렇게도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거요.」
하니, 선화는 웃으며 말했다.
「어찌 감히 낭군님을 놀라게 하겠어요. 낭군님 혼자 지레 겁을 먹었을 뿐이지요.」
주생은,
「향을 훔치고 구슬을 도둑질하는데 어찌 겁이 나지 않겠소.」
하고는 손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주생은 창문 위에 걸린 절구를 보았다. 마지막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름다운 선화가 무슨 근심이 있어 이런 시를 지었소.」
선화는 조용히 대답했다.
「여자의 몸은 수심과 함께 나서, 만나지 못했을 때는 서로 만나기를 원하고, 만나면 서로 헤어질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러니 어찌 여자의 몸으로서 편안하게도 근심이 없겠습니까. 하물며 낭군님은 절단지기(折檀之譏)를 어겼고, 저는 행로지욕(行露之辱)을 받았습니다. 불행히도 하루아침에 우리 정사의 자취가 발각된다면 친척들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이요, 동리 사람들은 천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우리들이 손을 잡고 해로하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의 일은 구름 속에 든 달과 같으며 숨은 꽃과도 같습니다. 설사 한때는 즐겁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할 테니 어찌하겠습니까.」
말을 마친 후, 눈물을 주룩 흘리며 원한 품은 태도를 보였다. 거의 자신을 억제하지 못했다. 주생은 눈물을 훔쳐 주며 위로해 말했다.
「대장부가 어찌 아녀자 하나를 얻을 수 없겠는가. 내 나중 중매의 절차를 밟아 예법으로 그대를 맞이할 것이니 너무 걱정을 마오.」
선화는 눈물을 거두며 치사했다.
「낭군님의 말씀대로만 될 것 같으면 저의 아름다운 얼굴이 비록 집안을 화목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나물을 캐어 정성껏 제사를 받드는 일만은 다하겠습니다.」
선화는 香盒을 열었다. 조그만 화장용 거울을 꺼내어 둘로 깨뜨렸다. 한쪽은 자기가 갖고 다른 한쪽은 주생에게 주며,
「동방화촉(洞房華燭)의 밤을 기다렸다 다시 하나로 합하와요.」
했다. 또한 흰깁 부채를 주면서 말했다.
「이 두 물건은 비록 하찮은 것이지만 제 마음의 간곡함을 나타내는 것이옵니다. 제 소원이오니 승난(乘鸞)의 처로 생각하시어 가을밤의 원한을 끼치지 마시옵고, 가사 항아(姮娥)가 그림자를 잃을지라도 꼭 밝은 달빛을 어여삐 여겨 아껴 주옵소서.」
이후로 그들은 밤이면 만났고 새벽으로 헤어졌다. 하룻밤도 거르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주생은 오랫동안 배도를 만나지 않았음을 생각했다. 그녀가 이상히 여길까 두려워 그녀의 집으로 가서 잤다. 밤사이 선화는 기다리지 못해 주생의 방에까지 갔다. 선화는 주생이 쓰던 단장 주머니를 풀어 보았다. 그녀는 배도가 지은 시 두어 폭을 발견했다. 그녀는 화가 뿌듯이 치밀었고 질투심이 솟아났다. 그래서 책상 위에 있는 붓을 들어 까맣게 지워 버렸다. 그 밑에다 안아미사(眼兒眉詞) 일절을 지어 푸른 비단에 써서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는 나가 버렸다.
그 시는 다음과 같았다.
창 밖의 그림자 보이는 듯 사라지고,
기울어진 달은 누각 위에 높이 떴네.
우수수 대나무 소리는 풍류 이뤄 요란하고,
오동나무 그림자는 집안에 가득한데,
깊은 밤 고요는 수심을 자아내네.
이 외로운 밤 방탕한 임은 소식조차 없으니,
어디서 노니느라 나마저 잊었는가.
아서라 생각 말자 잊으려 하나,
멀리 있는 정은 답답도 해,
그래도 행여나 시간을 헤며 앉아 기다리네.
이튿날 주생이 돌아왔다. 선화는 조금도 질투하거나 원망스런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다. 또 주머니를 끌러 본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생 스스로 깨달아서 부끄러워하게 하고자 함이어서 일체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루는 승상부인이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배도를 불렀다. 부인은 주생의 학행을 칭찬했다. 아들 글 가르치는 데 수고를 한다고 치사했다. 그리고는 손수 술을 따라 배도로 하여금 주생에게 잔을 권하게 했다.
주생은 이날 밤 술에 취해 정신이 없었다. 배도는 혼자 앉았으니 따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주생의 주머니를 끌러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지은 詞가 먹으로 지워진 것을 보았다. 마음은 자못 언짢았고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 밑에 안아미사를 보니 선화가 한 짓이 분명했다. 그녀는 몹시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이 사를 소매 속에 감춘 다음 주머니를 전처럼 싸매 두었다. 앉은 채 아침을 기다렸다.
주생이 술에서 깨어나자 침착하게 물었다.
「낭군님은 이곳에서 무작정 유할 건가요. 도대체 돌아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주생은,
「국영이가 공부를 아직 다 마치지 못한 탓이오.」
하고 대답했다.
「그래요. 처의 동생을 가르치는 것이니 불가분한 마음을 다해야겠지요.」
주생은 얼굴을 붉히며,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오.」
하고 물었다. 배도는 얼마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럴수록 주생은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방바닥만 응시했다. 배도는 그 사를 꺼내어 주생의 면전에 던지면 말했다.
「담장을 넘어 남녀가 서로 만나고(踰墻相從), 구멍을 뚫고 서로 훔쳐보는 격(鑽穴相窺)이구료. 이 어찌 군자가 할 짓입니까. 난 지금 곧장 들어가 부인께 말씀 올리렵니다.」
배도는 몸을 일으켰다. 주생은 황망히 그녀를 붙잡아 앉히고 사실을 고백했다.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히 빌었다.
「선화는 나와 백년해로를 굳게 언약한 사이인데, 어찌 죽을 곳으로 몰아넣는단 말이오.」
배도는 마지못해 뜻을 돌리고는,
「그렇다면 곧 저와 같이 돌아갑시다. 그렇지 않으면 낭군님이 저와의 언약을 어긴 바에야 제가 무어라고 맹세를 지킬 것이오리까.」
하고 말했다.
주생은 하는 수 없었다. 부인에게 딴 핑계를 대고 배도의 집으로 돌아갔다. 배도는 선화와의 관계를 알고 난 다음부터는 다시는 주생을 선랑이라 부르지 않았다. 마음속에 불평이 끓어올라서였다.
주생은 오로지 선화만을 생각했다. 몸은 나날이 여위어 갔다. 끝내는 병을 빙자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스무 날이 지나갔다. 돌연 국영이 병으로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주생은 제물(祭物)을 갖춰 영구 앞에 나아가 전(奠)을 올렸다.
선화 역시 주생과 이별한 후 상사의 병이 깊어 기거 동작도 남의 손을 빌어야 했다. 문득 주생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났다. 담장소복(淡粧素服)을 하고 주렴 안에 혼자 서 있었다.
주생은 전을 끝냈다. 멀리 선화가 보였다. 눈을 찡긋해 정을 표시했다. 머리를 숙이고 서성거리다 뒤돌아보니, 그녀는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세월은 흘러 몇 달이 지났다. 배도마저 병들어 눕고 말았다. 숨을 거두기 전, 그녀는 주생의 무릎을 베고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말했다.
「저는 봉비하체(葑菲下體)로서 그늘에만 의지하여 살아오다가 아름다운 청춘이 다 가기도 전에 시들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제 저는 낭군님과 영원히 이별을 하게 되었으니 비단옷이며 좋은 관현악기가 소용이 없고, 전날의 소원도 다 그만입니다. 다만 원하옵는 바는 제가 죽은 후에 낭군님은 선화를 취하여 배필로 삼으시옵소서. 그리고 내 죽은 뒤 시신은 낭군님이 왕래하시는 길가에 묻어 주신다면 죽더라도 산 것같이 여기고 편안히 눈을 감겠습니다.」
배도는 말을 마치고 기절했다. 한참만에 다시 깨어나 주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랑 주랑이여, 부디부디 몸조심하시어요. 몸조심 하…」
이러기를 몇 번하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다. 주생은 배도의 죽음을 몹시 슬퍼했다. 그는 그녀의 유언대로 시체를 호산(湖山)의 길가에다 고이 묻어 주었다. 祭文은 다음과 같았다.
「모월 모일에 매천거사(梅川居士)는 초황(蕉黃)․여단(荔丹)의 제물을 드리고 배랑(俳娘)의 혼백을 위로하며 제를 올리노라. 꽃의 정기와도 같이 아름답고 달의 자태와도 같이 좋은 몸을 지녔던 그대는 장대(章臺)의 버들인양 춤을 잘도 추어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와 같았도다. 미색은 아름다운 골짜기의 향기로운 난초를 능가하는 이슬 담뿍 머금은 붉은 꽃이었도다. 회문시(回文詩)에 있어서는 소약란(蘇若蘭)이 독보함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사(詞)에 있어서는 가운화(賈雲華)일지라도 명성을 다투기 어려웠도다. 이름은 비록 기적(妓籍)에 들었어도 그 뜻만은 그윽했고 정절을 지켰도다. 나는 바람에 휘날리는 버들가지와도 같아 방탕한 뜻을 지녀 외로이 물에 뜬 부평초의 신세였도다. 언채매향지당(言采沬鄕之唐)이요, 불우동문지양(不遇東門之楊)하여 서로가 사랑하며 길이 잊지 않기로 기약까지 두었도다. 교교한 달밤에 굳은 맹세할 적에는 창문엔 구름이 가리었고 화원에는 봄빛이 화창했도다. 그 사이에 경장(瓊醬)을 마시며 난생(鸞苼)함이 그 몇 번이었던가. 아아 슬프도다, 때 가고 일 지나 지극한 즐거움이 슬픔을 자아낼 줄 그 뉘라서 알았으리오. 비취(翡翠) 이불이 따뜻해지기도 전에 원앙의 단꿈이 먼저 깨어졌구료. 즐거움은 구름같이 사라지고 은정(恩情)은 비같이 흩어져 비단치마 바라보니 색은 이미 변했도다. 옥패에는 소리가 나지 않고 일척의 노호(魯縞)만이 아직도 향기롭구나. 주현녹복(朱絃綠服)이 온상에 헛되이 버려져 있고, 남교(藍橋)의 옛집은 홍랑(紅娘)에게 내맡겼도다. 오호라, 가인은 얻기 어렵고 덕음(德音)은 잊기 어렵도다. 옥 같은 맑은 자태, 꽃다운 고운 맵시가 눈에 선하도다. 하늘과 땅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니 망망한 이 한을 어이하며, 타향에서 짝을 잃고 그 누굴 믿을손가. 이제 노를 저어 온 길을 되돌아가려하나 호수와 바다는 넓고 험하며 세월은 덧없이 흐르기만 할 것이니, 천만리 머나먼 길을 외로운 조각배가 가고 간들 무엇을 의지하랴. 뒷날 그대의 넋 앞에 와 울겠다고 기약하기는 어렵도다. 산에는 사라진 구름이 다시 돌아오고, 강물은 밀렸다가 썰물 되어 오지만 한번 간 그대는 다시 오지 못하누나. 내 이제 그대를 마지막 하직하며 술로써 제사 지내고 글로써 이내 정을 나타내도다. 바람결에 부쳐 영결하노니, 그대의 혼이여 부디 흠향하시라.」
주생은 제사를 마쳤다. 그는 두 계집종과 이별하며 말했다.
「너희들은 집을 잘 간수하여라. 내 후일 성공해 돌아오면 반드시 너희들을 돌봐 주마.」
계집종들은 섧게 울며,
「저희들은 주인아씨를 어머니같이 우러러 받들었고, 아씨도 저희를 자식같이 사랑해 주시었어요. 이제 저희가 박복하여 아씨를 일찍 여의었으니, 오직 믿고 달랠 길은 서방님뿐이온데, 이제 서방님마저 가신다니 저희들은 누구를 의지하고 사오리까.」
하고는 더욱 섧게 울었다.
주생은 새삼 계집종들을 달래 주고는 눈물을 뿌리며 배에 올랐다. 그러나 차마 노를 저을 수 없었다.
이날 밤 주생은 수홍교(垂虹橋) 밑에서 묵었다. 멀리 선화의 집을 바라보니 촛대의 불빛만이 숲 속에서 깜박이고 있다. 그는 좋은 시절은 이미 지나간 것을 생각했다. 이제는 다시 만날 인연이 끊어졌음을 슬퍼했다.
그는 장상사(長相思) 일절을 읊었다.
꽃에도 버들에도
안개는 끼었는데,
춘색을 전하는 이 한밤,
늘어진 버들 숲에서 잠자도다.
좋은 인연 모질어
이 새벽녘,
임의 방 촛불은 막연도 한데,
되짚어 가는 길에 끝없는 만리 길을 바라보도다.
주생은 날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번 가면 선화를 영영 이별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머물자니 배도도 가고 국영도 또한 죽었으니 의지할 데라곤 없었다. 백 갈래로 생각해 보았으나 한 가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벌서 날은 훤히 밝아 왔다. 주생은 하는 수 없이 노를 저어서 물길을 떠났다. 선화의 집이며 배도의 묘는 점점 아득해졌고, 산굽이를 돌아 강이 굽어진 곳에 이르니 홀연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주생의 외가인 장(張)씨 노인은 호주(湖州)의 갑부였다. 그뿐만 아니라 화목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주생은 그리로 찾아가 의지했다. 장노인 댁에서는 주생을 지극히 후하게 대접했다. 주생은 비록 몸은 편안하였으나 선화를 생각하는 정은 갈수록 더해만 갔다. 주생의 마음을 몰라주듯 세월은 흘렀다. 춘삼월 호시절을 맞았다. 이 해가 바로 만력(萬曆) 임진년이었다.
장씨 노인은 주생이 나날이 여위어 가는 것을 이상스럽게 여겨 까닭을 물었다. 그는 감히 감추지 못해 사실대로 아뢰었다. 장씨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너의 마음에 맺힌 한이 있었다면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내 안사람과 노 승상과는 동성이어서 여러 대 동안 긴밀히 지냈다. 내 너를 위해 힘써 보겠으니 염려하지 마라.」
이런 다짐을 둔 다음날이었다. 노인은 부인을 시켜 편지를 써 늙은 하인을 전당으로 보내 왕사지친(王謝之親)을 의논했다.
선화는 주생과 이별한 후 날이면 날마다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래서 여윌 대로 여위어만 갔다. 승상 부인도 선화가 주생을 사모하다 얻은 병인 줄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뜻을 이루어 주려 했으나 이미 주생은 떠나 버려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돌연 노부인(盧夫人)의 편지를 받았다. 온 집안이 놀라며 기뻐했다. 선화도 누워 있다가 억지로 일어나서 머리도 빗고 세수도 하며 몸단장을 하는 등 전과 같았다. 이 해 구월로 혼인날이 정해졌다.
주생은 날마다 포구로 나가 늙은 종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흐레가 되던 날이었다. 그 늙은 종이 돌아왔다. 정혼의 뜻을 전하고, 더욱이 선화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주생은 급히 편지를 뜯었다. 분향 냄새가 그윽했다. 편지지에는 눈물 자국이 번져 있었다. 그는 선화의 애원(哀怨)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박복한 몸 선화는 목욕재계하고 무랑께 올리옵니다. 저는 본래 약질이어서 깊은 규방에서 수양하고 있습니다. 매양 청춘이 수이 감을 근심했고,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한탄했습니다. 비록 연심을 품었다가도 사람을 만나면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버들가지를 보면 춘정이 무르녹고, 나뭇가지의 꾀꼬리소리를 들으면 또한 연모심이 몽롱해집니다. 하루아침에 고운 나비가 소식을 전하며 산새가 길을 인도했습니다. 동방지월(東方之月)에 주자재달(姝子在闥)하여 낭군님이 담을 넘어 오심에 있어서 저는 몸을 아끼지 못했습니다. 선약(仙藥)을 달이려고 하계에 내려와 일은 마쳤지만 옥경(玉京)에 올라가지 못해 거울을 둘로 나누어 한가지로 영원한 맹세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호사다마하여 호시절을 다 놓치고 말았습니다. 마음만은 사랑하기 그지없으나 몸은 점점 여위어짐을 슬퍼하고 있습니다. 낭군님이 한번 가신 뒤 봄은 다시 왔으나 소식이 없어, 이화에 비 내리고 황혼 빛이 문을 비추어 잠 못 이뤄 전전하옵고, 낭군님 생각으로 자꾸만 여위어질 뿐입니다. 비단 장막은 낭군님이 없어 주야로 쓸쓸하옵고, 촛불을 밝힐 일 없으니 저녁으로 방안은 침침할 따름입니다. 하룻밤에 몸 망치고 백년의 정을 품으매 이미 시들어져 가는 몸이지만 낭군님만을 생각합니다. 밤이면 달을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낭군님 생각으로 간장은 녹아나고 만나고 싶은 마음 간절하기 그지없으나 갈 수 없는 신세이옵니다. 만약 이미 이런 일이 있을 줄을 알았던들 살아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월로(月老)가 소식을 보내오매 가일(佳日)이 기다려지오나 홀로 있으니 초조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병은 나날이 깊어져 꽃 같은 얼굴은 광채가 사라지고 구름 같은 머리에는 빛이 없어졌습니다. 이후 낭군님이 저를 본다 할지라도 다시는 전처럼 은정이 솟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와서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사오나, 다만 품고 있는 정성을 다하지 못한 채 문득 아침 이슬과 같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멀고 먼 황천길을 가는 넋이 한이 무궁할 것이 두렵습니다. 이제는 아침에 낭군을 뵈옵고 저의 기구한 정을 호소나 할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원이 없겠나이다. 산천은 첩첩하여 먼 구름 밑에 떨어져 있는 거리를 편지 전할 사람이 빈번히 다닐 수도 없는 일이옵니다. 이제 멀리 목을 빼어 바라보니 뼈는 녹고 넋은 날 뿐입니다. 호주의 땅은 기후가 좋지 못하여 질병이 많습니다. 낭군님은 자중하시어 부디 몸조심하옵소서. 끝으로 이 정겨운 편지에 할 말을 다하지 못한 것은 돌아가는 기러기에 부탁하여 보내겠습니다.」
편지를 읽고 난 주생은 꿈꾸다 깨어난 것만 같고, 술에 취했다 정신이 난 것만 같았다. 슬프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그러나 오는 구월을 손꼽아 보니 아직도 아득했다.
주생은 혼일을 고쳐 잡으려고 장씨 노인을 찾았다. 다시한번 늙은 종을 보내달라고 청한 후 선화에게 보내는 답장을 썼다.
「사랑하는 선화여. 삼생(三生)의 인연이 깊어 천릿길에서 온 편지를 받았소. 사물을 보고 사람을 생각하니 어찌 한 시인들 잊을 수 있으리오. 지난날 나는 그대의 집에 뛰어들었소. 몸을 경림(瓊林)에 의탁하였다가 춘심이 발동하여 애정을 금하지 못하고 꽃 속에서 맹약하고 달 아래 인연을 맺었소. 그때는 외람되게도 많은 은정을 입고 굳은 맹세를 하였소.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세상에서는 깊은 은혜를 갚을 도리가 없다고 여겼소. 인간의 호사에 대한 조물주의 시샘으로 하룻밤의 이별이 해를 넘겨 원한이 되었소. 이렇게 될 줄 어찌 알았으리오. 피차 멀리 떨어진 데다 산천이 가로막혔으니, 하늘가에서 무한히 슬퍼하는 이 몸은 오(吳)나라 구름 속에서 우는 기러기요, 초(楚)나라의 산골짜기에서 우는 원숭이 같은 신세가 되었소. 이제 친척의 집에서 홀로 잠을 자니, 외롭고 쓸쓸하여 목석이 아니고는 어찌 섧지 않으리오. 아, 아름다운 그대여. 이별한 후의 이 심정은 그대만이 알 수 있으리라. 옛사람은 하루를 못 만나면 삼년과도 같다 했은즉, 이것으로 미룬다면 구십년이나 되오. 만약 천고마비의 가을날에 나가서 가일을 정한다면, 차라리 황산(荒山)에 시들어진 풀 속에서 나를 찾는 것만 못하리다. 정을 다 담지 못하고 말을 다하지 못했는데 편지지에 엎드린 채 목이 메어 눈물이 나니 더 할 말을 모르겠소.」
주생이 편지를 써놓았으나 전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조선이 왜적(倭敵)의 침략을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떠돌았다. 마침내 원병을 중국에까지 청해 왔다. 사태는 매우 급박했다. 황제는 조선이 지극히 중극을 섬기므로 불가불 구원을 해야 했고, 또 조선이 무너지면 압록강(鴨綠江) 서부지방은 편안한 날이 없을 것임을 간파했다. 항차 왕업의 존망계절(存亡繼絶)이 달린 판국이어서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도독(都督) 이여송(李如松)에게 군대를 통솔하여 적을 무찌르도록 어명이 내렸다.
이때 행인사(行人司)의 행인 설번(薛藩)이 조선을 다녀와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북방 사람은 오랑캐를 잘 막아내며 남방의 사람들은 왜놈을 잘 방어하오니, 이 싸움은 남방의 군병이 아니면 어렵겠나이다.」
이래서 호절(湖淅)의 여러 고을에서 병정을 급히 모집하게 되었다. 그때 유격장군이었던 어떤 사람이 평소에 주생의 성명(聲名)을 알고 있어 출전하는 날에 끌어내어 서기의 소임을 맡겼다. 주생은 굳이 사양했으나 어쩔 수 없어 직책을 맡았다. 그는 조선으로 나왔다.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에 올라 고풍(古風) 칠언시(七言詩)를 지었다. 그 전부는 알 수 없으나 그 결구(結句)는 다음과 같았다.
시름에 겨워 강가 누각에 오르니,
누 밖에 청산은 첩첩이 싸였구나.
저 산은 고향을 바라보는 내 눈을 가리면서,
어찌하여 시름이 오는 길은 막지 못하나.
이듬해 계사년(癸巳年) 봄이었다. 명군은 왜적을 대파하여 경상도로 몰아붙였다.
주생은 밤낮으로 선화를 생각하여 마침내 병이 중해졌다. 그는 종군해 남하할 수 없어 송경(松京)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나는 때마침 일이 있어 송경에 갔었다. 한 여관에서 주생을 만났다. 그러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글로써 의사를 통했다. 주생은 내가 글을 안다고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나는 주생에게 병든 내력을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근심에 싸여 응답이 없었다.
하루는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나는 주생과 같이 불을 밝히고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생은 답사행(踏沙行)의 사(詞) 한 수를 지어 보여 주었다.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신세.
이별의 회포를 어이 다 쏟을까.
돌아가는 기러기는 어두운 강가 나무에 줄지어 앉았구나.
여창의 희미한 촛불은 이 마음 설레게 하고,
황혼의 빗소리는 시름을 더하누나.
낭원(閬苑)은 구름에 싸였고,
영주는 바다에 막혔구나.
임 있는 곳은 예서 얼마나 되나.
차라리 물위의 부평초 되어,
하룻밤 흘러 흘러 오강으로 가고자.
나는 몇 번이나 이 사(詞)를 읊었다. 그리고 사 중의 정사를 탐문했다. 주생은 더 이상 감추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나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는 일체 말하지 말라는 당부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시사(詩詞)를 아름답게 보았다. 그리고 이들의 기우(奇遇)를 한탄했고, 좋은 시일을 놓친 데에 대하여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헤어진 후 다시 붓을 잡아 이를 써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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