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생몽유록>
세상에 원자허(元子虛)란 사람이 있었는데, 비분강개한 선비이다. 기개가 크서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다 보니 세상에 용납되지도 못했다. 그러다보니, 자주 나은과 같은 한을 품었으나, 원헌과 같은 가난을 감당하기도 어려워 낮이면 밭에 나가서 밭갈이하고 밤이면 돌아와 옛 성현들의 글을 읽고자, 바람벽을 뚫어 이웃집에서 새 나오는 불빛으로 책을 비추어 보기도 하고, 주머니에 반딧불을 넣어 두었다가 꺼내어 글을 읽기도 하는 등 아니해 본 일이 없었다.
일찍이 역사책을 읽다가 역대 왕조가 위태롭거나 망했거나 나라의 운명이 다했거나 국세가 꺾이는 대목에 이르면, 책을 덮고 흐느껴 울면서 마치 자신이 그 때에 처해서 거의 망해 가는 것을 보면서도 힘으로는 도와 줄 수 없는 자처럼 조급해 했다.
중추절 달밤이었다. 달빛을 따라 책을 뒤적이다가 밤이 이슥해지자 정신도 피곤하여 의자에 기댄 채 자기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몸이 갑자기 가벼워지더니 아득히 솟구치는 모습이 날렵하게 바람을 타고 오르는 듯도 했고, 가벼이 날개가 생겨 신선이 된 기분이었다.
어떤 강기슭에 다다르니, 길게 뻗은 강물은 굽이굽이 돌아 흐르고, 주위의 산봉우리는 우뚝우뚝 솟아 있었다. 밤은 이미 깊었는지라, 삼라만상은 적막하고 달빛은 대낮처럼 밝아 물결에 어린 달빛은 비단 같은데, 잠잘 곳을 찾는 기러기가 갈대 숲 위에서 우짖을 즈음에 찬이슬만 단풍 숲에 총총히 맺혀 있었다. 근심에 어린 눈을 쳐드니 천년 동안 불평하는 마음을 가진 듯 싶더니, 갑자기 긴 한숨 소리와 함께 시 한 수를 낭랑히 읊조렸다.
한맺힌 긴 강은 오열만 하고 흐르지 않고,
갈대꽃 단풍잎엔 찬 바람만 몰아치네.
이곳이 분명 장사(長沙) 강기슭임은 확실한데,
달밝은 이 밤에 영령은 어디서 노니는가.
이리저리 거닐며 둘러볼 때에 홀연히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다가오더니 조금있다가 갈대꽃 깊숙한 곳에서 잘 생긴 남자 하나가 갑자기 나타났다. 복건을 쓰고 야복을 하였는데, 기상이 맑고 눈썹이 수려하여 백이․숙제의 유풍이 나부기는 듯했다. 가까이 와서 절을 하며 말했다.
“자허는 어찌 이렇게 늦었소. 우리 임금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요.”
산도깨비나 물귀신이 아닌가 의심되어 놀란 채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용모가 준수하고 행동이 단아하여 저도 모르게 특출함이 칭찬되었다.
곧바로 나란히 걸어 백여 보 남짓 가니, 앞에는 정자 하나가 강가에 우뚝 솟아있고 한 사람이 난간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의관으로 보아 왕(王)과 똑같았다. 또 다섯 사람이 모시고 앉아 있는데, 모두 인간세상의 호걸들이었고 위풍당당한 외모와 의기양양한 풍채로 보아, 가슴속에는 옛날 고마(叩馬)와 도해(蹈海)의 의리를 품은 듯했고, 뱃속에는 경천봉일(擎天捧日)의 충절을 간직한 듯해, 진실로 어린 임금을 맡기만 하고 한 나라의 정치를 부탁할 만한 인물이라 할 만했다.
자허가 온 것을 보고는 모두 나와 맞이했지만, 자허는 다섯 사람과 인사를 나누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임금 앞에 알현하고 돌아나와 서서 좌정하기를 기다렸다가 말석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허의 윗자리에는 복건자였고, 그 위로 다섯 사람이 순서대로 앉았다. 자허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자못 불안하기만 했다.
왕이 입을 열었다.
“일찍이 들으니, 난초 향기는 엷은 구름을 매우 사모한다 했거늘. 좋은 밤에 만났음을 의아하게 생각할 것도 없소이다.”
자허는 그제서야 자리를 비껴 앉으며 감사했다. 자리가 정해지자, 서로 함께 고금의 흥망사에 대해 논의했다. 이야기가 한참 진행돼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복건자가 휘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요․순․우․탕 이후에 호리거나 아첨하여 천자의 지위를 탈취한 자는 자리를 잡고 있고, 신하로서 임금을 벌한 자는 이름을 떨치고 있으니, 천년동안 도도히 흘러 내려온 풍조를 결국에는 어찌할 수도 없게 되어 버렸소. 아아! 네 임금이 영원히 효시가 될 것이오...”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아서 왕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만두시게. 그게 무슨 소리요? 네 임금만큼 덕을 지니고 네 임금 시대에 살았다면 괜찮겠지만, 네 임금만큼 덕도 지니지 못했으면서 네 임금 시대에 산 것도 아니라면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오. 네 임금에게 어찌 죄가 있다 하시오. 단지 자리를 잡고 이름을 떨치고 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오.”
복건자는 머리를 숙여 절을 하고 다시 머리를 조아린 채 사과하며 말했다.
“마음속이 편치 못해 말이 너무 지나친 것을 알지 못했사옵니다.”
“그만두시오. 좋은 손님이 좌중에 계신데 한가히 딴 일만 의논해서야 되겠소. 달 밝고 바람 맑은 이렇듯이 좋은 밤에 뭐하면 좋겠소?”
곧바로 비단 옷을 벗어주며 강마을에 내려가 술을 사오게 했다. 술이 몇 순 배 돌자, 왕은 그제서야 잔을 든 채 오열하더니, 다만 여섯 사람에게 말했다.
“경들은 어찌 각자의 뜻을 말해 마음 속 깊은 원한을 풀려고 하지 않소.”
여섯 사람이 대답했다.
“전하께옵서 먼저 노래를 지으시면 신들이 뒤를 이을까 합니다.”
왕은 그제서야 초연히 옷깃을 여미더니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듯 노래를 읊었다.
목 메인 강 물결도 끝없이 흐르는데,
기나긴 내 시름을 뉘와 함께 같이할꼬.
생전에 왕노릇도 죽으면 외로운 넋이 되고,
새로된 위왕은 거짓으로 받들 뿐이로다.
고국의 백성들은 초(楚)나라 수중으로 죄다 옮아가도,
6, 7인의 신하만 뜻을 같이해도 넋을 의탁할 수 있다네.
오늘 저녁이 무슨 날이길래 함께 강루(江樓)에 모였는가?
물결 소리며 달빛마저 내 마음을 슬프게 하는데,
슬픈 노래 한 곡조 사방에 퍼지네.
노래가 끝나자 다섯 사람이 각각 한 수씩 읊었다. 첫번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읊조렸다.
한을 깊이해도 재주로는 외로운 넋을 의탁할 만하지 못해서,
나라 잃고 임금을 욕 뵈고 내 몸까지 버렸어라.
지금처럼 살자니 천지에 부끄러울 뿐이거니,
당시에 일찍 도모하지 못한 것 후회스럽네.
두 번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읊조렸다.
은혜입은 선조(先朝)에선 입은 총애도 많았거니,
위기에 처하여 천한 몸 죽는 것을 애석해 햐랴.
죽은 뒤 이름만 여전히 빛남이 가련하거니,
의(義)와 인(仁)을 이룸이 부자(父子)가 같았네.
세 번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읊조렸다.
장한 절개를 어찌 작록으로 더럽힐까
임금께 올린 글 여전히 채미심이 안았도다.
보잘것없는 몸 한번 죽는들 말해 무엇하리.
당시 임금이 침에 계심을 통곡할 뿐이로다.
네 번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읊조렸다.
천한 몸일망정 담은 절로 높고 크거서
어찌 차마 살기를 꾀하다 상륜(喪淪)을 당하리.
죽을 즈음 지은 한 수 시는 언사도 착했거니
부끄러운 것은 두 마음 품은 이로다.
다섯 번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읊조렸다.
슬프고 슬프도다. 당일 결국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죽으면 그뿐, 죽고난 뒤 명예를 어찌 논하리.
치욕을 씻지 못한 게 천추에 가장 한 되는 일이거니.
집현전에서 일찍이 초한 것이 상공서였다네.
복건자가 머리를 긁으면서 길게 읊조렸다.
눈을 들어 바라보는 산하는 옛날과 다르니,
신정에서 함께 초나라 나그네의 슬픔을 짓노라.
마음까지 놀란 흥망에 간장이 찢기는데,
분하고 원통한 충사에 눈물만 흘리노라.
율리 맑은 바람 쐬며 도연명은 늙어죽었고,
수양산 차가운 달빛 아래 백이는 굶어죽었다.
한편의 야사가 뒷날 전해진다면,
천추에 선악의 사표 되어 남으리라.
읊기가 끝나자, 자허에게 글 짓기를 부탁했다. 자허는 본래부터 강개한 사람이다. 눈물을 닦으면서 슬프게 읊조렸다.
지나간 일을 누구에게 물으리
황산의 흙은 한 줌뿐인데.
원한 깊어 정위새처럼 죽었고,
영혼 끊켜 접동새처럼 슬프구나.
고국엔 어느 때나 돌아가나
강루에서 이렇게 날마다 노니는데.
애절한 노래소리 몇 가락에
새벽달 갈대꽃만 가을이라네.
노래가 끝나자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모두 처연히 떨어지는 눈물을 어찌 할 수 없었다. 영웅호걸처럼 생긴 한 선비가 신장은 보통을 넘고 용맹도 특출했고 얼굴은 대추빛이요 눈은 밝은 별빛과 같은데, 옛날 문천상(文天祥)의 의리나 진중자(陳仲子)의 청렴을 지닌 듯, 위풍이 늠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심까지 우러나오게 하였다.
왕 앞에 들어와 배알하고는 다섯 사람을 돌아보고 말했다.
“아! 썩은 선비들과는 함께 대사를 이룰 수가 없구나.”
그러더니 칼을 뽑아들고 일어나 춤을 추었다. 슬픈 노래 소리가 더욱 비분강개하여 마치 큰 쇠북이 울리는 것 같았다.
바람이 소슬하니, 나뭇잎은 찬 물결에 지고, 칼을 쓰다듬으며 휘파람을 길게 부니, 북두성마저 기울었네.
살아서 충효를 온전히 하려다, 굳센 혼백되어 죽으니.
흉금에 품은 뜻을 어찌 둥근 명월에 비유하랴.
아! 처음부터 함께 근심할 수 없었던 것을, 썩은 선비들을 누가 책망하리.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달빛은 검게 변하면서 구름에 가려지고, 비가 뿌리고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데, 갑자기 천둥소리가 크게 울렸다. 일순간에 모두들 재빨리 흩어져버렸다.
자허도 놀라 깨어나 보니, 꿈이었다.
자허의 친구 매월거사(梅月居士)는 꿈 이야기를 듣고 통분해 하면서 말했다.
“대개 예로부터 임금이 어둡고 신하가 혼미하여 결국 나라가 전복된 자가 많았다. 이제 그 임금을 보니 현명한 군주임에 틀림없고, 자신의 여섯 신하도 모두가 충의지사들인데, 어찌 이런 신하로서 이런 명군을 모셨으면서도 이처럼 참혹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아! 형세상 그렇게 된 것이면 불가불 하늘의 운명으로 돌려야겠만, 선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나쁜 사람에게 화를 내리는 것이 하늘의 도리가 아니던가? 그 모든 것을 하늘의 운명으로 돌릴 수 없다면 그윽하고 막연한 이런 이치는 자세히 알기 어렵게 될 것이다. 우주는 끝없이 유유하여 단지 지사의 한만 더할 뿐이다.”
그러고는 시 한 수를 지어 화답했다.
만고에 비길 데 없는 슬픈 사연도
창공을 스치는 새 한 마리에 불과하도다.
찬 연기는 동작대를 에워싸고
가을 마른풀은 장화궁을 덮었네.
아! 요순은 아득한데,
수많은 탕무만이 어지럽구나.
달 밝은 상강(湘江)에 물이 넓으니
근심어린 죽지가(竹枝歌)만이 들리누나.
선생이 일찍이 꿈속에서 단종을 모시고 육신 및 최인촌과 더불어서 강가에서 놀면서 서로 시를 짓고 화답한 적이 있었다. 꿈에서 깨자마자 느낀 바 있어 글로 기록해 몽유록이라 했다. 대개 우언이 깊다. 선생의 전후 저술은 직접 불태워 없앴지만 오직 탄세․몽유 2편만은 다행히 면하게 되었다. <堯舜> 이하 <非也>까지 91자는 이미 전간(前刊)에서 결락되었으므로 오늘 장릉지(莊陵誌)에 따라 기입해 둔다. 그러나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자행을 좀 치우치게 써서 다시 살필 기회를 기다린다. <관란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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