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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이해 / 김흥규 : 5.문학비평




5.문학비평


이해의 전재

  문학에 관한 일체의 사유와 논의를 총괄하여 문학비평이라 규정할 때, 그것은 의식의 대상이 되는 문학행위 및 작품보다 시간적으로 뒤에 위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이 원초적인 수준의 감정 표현이나 집단 체험의 무의식적 표출이라는 수준을 넘어 어느 정도의 자각적 요소를 지니게 되면서부터는 비평적 의식이 창작과 수용의 불가결한 구성부분이 된다. 의식을 동반하지 않는 실천이 있을 수 없듯이, 문학행위가 있는 곳에 그에 관한 의식 곧 비평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다. 따라서 한 민족의 문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작품을 중심으로 한 문학행위의 역사적 전체상과 아울러 그 역동적 정향을 반영하고 또 촉진하였던 비평의 실질을 해명하는데서 온전하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문학의 여러 영역 중에서 비평 부문은 연구의 진전이 부진한 편이며, 특히 19세기까지의 고전비평이 더욱 그러하다. 물론 여기에는 그럴 만한 외적 요인의 제약이 있었다. 대체로 보아 11세기 이전 즉 고려전기까지의 비평 자료는 몇몇 단편들만이 산발적으로 발견될 뿐이어서 당대의 문학의식을 충실히 파악하기에 미흡하며, 그 이후의 문헌들도 한문문학에 관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이 그로써 다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를 전후한 시기의 문화적 격변을 체험하면서 충분한 비판적 조명의 기회를 거치지도 못한 체 19세기까지의 사상 및 이념 체계에 대한 전면적 부정의 시각이 압도하게 된 사실도 이에 중요한 관련이 있다. 식민지 지배의 문화 구조 속에서 타자중심적인 외향화로 기울었던 문학 동향은 이를 좀 더 강화하면서 고전비평의 정당한 이해를 크게 제약하였다.

  이와 같은 의식의 편향은 우리 문학비평의 전체적 인식에 적지 않은 왜곡을 초래하였고, 현대비평의 내실과 주체적 전망을 수립하는 데에도 장애가 되었다. 고전비평과 현대비평을 완전히 동떨어진 두 영역인 듯이 여기는 통념은 바로 그 산물이다. 아울러, 고전비평은 중국 문학비평의 그늘 속에 있는 것으로, 현대비평은 서구 문학이론의 압도적인 영향에 의지하여 발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가정하는 이식, 영향사관이 바로 그 가운데서도 특히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물론 우리의 문학비평이 20세기 초를 고비로 하여 심각한 갈등과 변모를 겪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고전비평과 현대비평이 각기 동아시아 문학사상의 전통과 근대 서구의 문학론에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는 점도 마땅히 인정하여 그 관련상과 의미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도니다. 거대한 역사적 충격과 자기변혁의 체험을 거친 문학에서 그에 상응하는 비평적 변모가 발견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각 시대마다의 대외적 교류와 접촉을 통해 비평의 시야가 전위 혹은 확대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항에도 불구하고 문학비평이 한 역사집단의 문학행위를 지탱하는 의식의 표현인 한, 거기에 자기동일성의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외래적 영향을 선택, 흡수 하는 주체의 요구와 논리가 소홀히 되어도 좋다는 논법은 있을 수 없다. 거듭 말하거니와 문학에 관한 사유와 논의의 총체로서의 비평은 모든 문학행위의 본질적 일부이며, 바로 그러한 시각에서 한국 문학비평의 역사적 실체가 면밀하게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당위적 요청이 우리의 문학사상, 문학이론, 실제비평에 관한 연구성과로서 충실히 구현되려면 아직도 많은 부분작업과 재체계화의 모색이 필요하다. 그러한 과제를 앞에 둔 국면에서 한국 문학비평의 윤곽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분명히 무리한 일이다. 그러나 이를 염두에 둔 잠정적 약도로서 지금까지의 성과를 토대로 한국 문학비평의 역사적 전개 양상을 간략히 살피는 일은 그것대로의 작은 효용을 가지리라 생각한다.


고대의 언어, 문학 의식

  우리 문학사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의 문학의식이 어떠하였는가는 자료의 결핍으로 인해 알기 어려우나 현전하는 고대가요와 관련 설화에 의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 윤곽을 더듬어 볼 수 있다. 현전 작품 중 가장 오랜 시가인 <공무도하가>와 <황조가>는 이미 서정시로서의 성격이 뚜렷한데, 여기에 ᄄᆞᆯ린 기록들은 노래가 지어진 동기와 정황을 설명하는 가운데 시가의 정서적 표현 기능에 대한 원초적 이해가 당시에 이미 형성되어 있음을 알려 준다. 즉, 남편을 잃은 여인이 애끓는 심정을 노래하고 이를 전해들은 여인이 다시 그것을 음률에 실어 가창하였다든가, 사랑하는 여인 잃은 사나이가 가누기 어려운 쓸쓸함을 노래로 읊조렸다는 이야기 속에 시가를 내면적 정서의 표출로 이해하는 관점이 아직 선명히 논리화되지 않은 대로 엿보인다.

  한편, <구지가>와 그에 딸린 설화는 노래의 주술적 기능에 대한 믿음을 주요 인소로 포함하고 있어서, 고대인들이 주술적 제의와 관련하여 시가의 신비적 힘을 믿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들 고대 시가는 모두 전설적 색채를 띤 것으로 작품 내용상의 연대가 그 바탕에 깔린 시가관의 존재 시기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위에 언급한 정도의 원초적 문학인식은 대체로 고대국가 성립기 무렵에는 형성되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신라의 향가에 이르러 우리문학은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다양한 갈래를 갖추었고, 이에 관한 인식도 여러 방향으로 분화되었음을 <삼국유사>의 단편적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시가가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킬 만한 힘을 가진다는 믿음에 관련된 자료들이다. 순정공이 해룡에게 부인을 빼앗기자 사람들을 모아 <해가>를 부름으로써 수로부인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는 노래의 문면부터가 <구지가>의 경우를 연상케 하거니와, 융천사가 지어 혜성과 일본병을 물리쳤다는 혜성가, 잣나무가 시들도록 하는 원력을 나타내어 효성왕을 뉘우치게 한 신충의 <원가>, 역신을 물리친 <처용가>, 그리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었다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자연의 변화를 일으킨 왕거인 이야기 등을 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들 노래와 부대설화는 모두 시가의 신비로운 힘에 관한 것으로서 그 바탕에는 노래로써 표현된 강렬한 소망, 분노, 정지가 초자연적 감응의 힘을 발휘한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이와 같은 유형의 자료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삼국유사>가 신이한 일사들을 많이 수두룩한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당시의 문학의식을 파악하는 데에서 시의 사회, 정치적 효용 및 정서적 표달 기능에 관한 인식 또한 발달해 있었음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라의 제3대 유리왕이 어진 정치를 펴서 민속이 표달해졌으므로 지었다는 도솔가와 경덕왕이 덕치의 이상을 담은 노래로 충담사에게 짓게 한 안민가는 사회, 정치적 이념의 표현과 효용성을 중시하는 시가관 또한 이 시기에 공존하였음을 말해 준다. 한편, <황조가>와 <공무도하가>에서 보였던 시의 정서적 표현 기능에 대한 인식은 <제망매가> 기록의 경우처럼 내면의 고뇌와 종교적 발원이 결합되어 심원한 초자연적 감응력을 발휘하는 이야기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사람의 마음에 담긴 절실한 체험과 욕구가 언어로써 표출되지 않을 수 없다는 필연성의 인식은 <삼국유사> 경문왕 대목의 복두장 이야기와 같은 상징적 설화를 낳았다.

  한편, 한문의 사용 범위가 넓어지고 한문문학이 이루어지면서는 이에 관한 비평도 싹텄으리라 보인다. 특히 신라 하대에 이르러 육두품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한학이 ㅂ라달하면서 문학의식도 높은 수준에 이르렀던 것 같다. 설총의 <화왕계>에 보이는 바, 우언을 통해 왕자의 도리를 밝히고자 하는 작법 속에는 문자행위 내지 문학행위를 도덕적, 정치적 이념과 결부시켜 파악하는 의식이 내재해 있다. 최치원은 <시편으로써 성을 기르고 자료를 삼고 서권으로써 몸을 세우는 근본을 삼는다>라고 하여 심성의 도야와 수신에서 문학적 수련의 의의를 찾는 가치론의 자취를 보여준다. 이로써 볼 때 이 시기의 문학론은 한문문학의 성취를 바탕으로 유가적인 문학의식을 소화하면서 보다 정비된 논리화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비평

  고려가 건국되면서 우리문학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한문문학의 융성이다. 신라 시대의 골품제를 철폐한 고려 왕조는 중앙집권적 정치 체제의 수립을 위한 방편으로 과거제를 택하였고, 이에 따라 한문문학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당시의 과거는 시,부,송,책을 과목으로 하여 문학적 교양을 평가하는 제술업과 서,역,시,춘추를 과목으로 하여 경학의 이해를 측정하는 명경업으로 나뉘어 있었던바, 이 중에서도 제술업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따라서 시문의 능력은 관료로서의 입신과 처세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신라 말기까지 육두품을 중심으로 한 소수 지식층의 범위에서 성장해 온 한문문학은 이에 이르러 완전히 귀족, 지배층의 문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문학론이 곧바로 한문문학에로만 집중되어 갔던 것은 아니다. 균여의 동시대인으로 보원십원가를 한역한 최행귀는 그 역가서에서 한시와 향가가 언어, 형식에서는 전혀 다르지만 그 시적 깊이의 오묘함은 우열을 나눌 수 없이 대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여, 민족어로 된 시가에의 자긍을 명료하게 논술하였다. 일연은 향가와 심원한 호소력과 아름다움을 예찬하여 시,송에 견주었다. 이와 같은 의식의 맥락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문학론이 한문문학에 치중되었다는 사실과 이에 따라 동아시아의 중세적 보편문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비평적 인식의 심화가 추구되었다는 점은 물론 그것대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문문학의 융성은 당연히 이에 상응하는 비평적 의식과 논의의 발달을 동반하였을 터이나 고려 전기의 문집과 비평 문헌은 전해지는 것이 드물어서 소상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김부식의 경우로 미루어 본다면 옛 성현이 남긴 경전을 존중하며 진실한 고전ㅇ르 통해 유가의 도리를 시현하는 문학이야말로 최상의 가치를 지닌다는 이념이 점차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던가 한다. 앞서 언급한 최치원의 명제부터가 당대 고문운동 이래 문학론의 유가적 이념성에 상당히 근접한 흔적을 보이지만, 김부식의 시대에는 그러한 방향으로의 진행이 좀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문학의식은 병문류의 장식적, 심미적 문학을 배척하고 고문을 숭상하여 유가이념에 부응할 것을 표방하면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사상적 토대는 아직 철저하지 못했다. 그가 말한 고문은 이념의 준거이기보다는 문장의 전범이었다. 시풍이나 정치적 입장에서 김부식과 대립적이었던 정지상은 또 다른 종류의 문학적 지향과 의식을 가지지 않을까 추정되나, 아쉽게도 논의할 만한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가치론상으로는 상고적 전범성을 중시하면서도 문사 화미함을 아울러 추구하던 문화의식은 무신란을 고비로 하여 새로운 전환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 중에서도 우선적으로 주목할 현상은 문인풍의 교양과 취미에 바탕하여 시,문의 세련을 중시하던 문신 귀족들이 물러나고 문인, 관료 사회의 인적 구성이 훨씬 다양해지면서 문학적 기풍 또한 다변화 하게 된 점이다.

  문학적 교양과 재능이 곧 관인으로서의 입신에 직결되어 있던 중세 사회에 있어서 한정된 수의 문벌귀족이 권력을 장악한 상태란 곧 문학적 취향을 둘러싼 의ᅟᅧᆫ, 논리의 분화가 현저하게 제약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문인 관료 사회에서 문권이란 정치권력과 별개의 것이 아니어서, 이에 대한 도전이나 현저한 이탈은 당사자의 사회적 입지에 명백히 불리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볼 때 무신집권기에는 문벌 귀족 세력의 쇠퇴 혹은 몰락과 함께 새로운 사인층이 다수 등장함으로써 문학상의 지배적 권위가 약화되고 서로 다른 문학의식 및 논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의 조성되었던 것이다. 고려 후기의 비평이 전기에 비해 훨씬 풍부하다는 사실은 단순히 문헌 전승 때문만이 아니라 이러한 배경적 요인에도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고려 후기 비평의 활기는 다수의 문집을 통하여는 물론 문인사회의 활발한 작품론을 바탕으로 출현한 여러 종류의 시화집 형태로도 표현되었다. 파한집, 보한집, 역웅패설, 등의 시화집은 시 작품의 창작, 수사, 품격, 가치 등에 관한 실제비평적 의론을 일화들을 모은 것으로서, 당시의 비평적 안목과 취미가 어떠하였는가를 파악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고려 후기 비평의 내용은 무척 다채로우나, 그 가운데서 다음의 두 가지 관심사 중의 어느 한편 또는 이들의 복합적 관련을 문제로 삼는 문학론들이 특히 주목된다. 그 하나는 시 창작에 있어서의 수사적 방법에 관한 논의이며, 다른 하는 전통적 관습, 전례와 개인의 창조적 자발성의 관계의 문제이다. 전자에 대한 비평은 용사,탁구, 대우, 성률, 비유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여 어떻게 하면 섬세하고도 탁월한 언어를 구사하여 뛰어난 시를 쓸 수 있는가, 그리고 작품의 심미적 가치는 어떤 품격과 수사적 자질을 통하여 가늠될 수 있는가를 밝히는데 주력하였다. 후자에 관한 논의는 수사적 조탁이 극단화되는 경향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부터 촉발되어, 시의 근원적 가치를 좌우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심각한 성찰의 과제로 부각되었다. <용사>와 <신의>를 둘러싼 논란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대표적 쟁론이다.

  신의와 이규보를 각기 중심적 논자로 하는 용사론, 신의론의 대립이란 물론 그들 사이의 차이를 예각화하여 집약한 결과이다. 즉, 시에 있어서의 새로운 의경의 필요성을 전자가 부정하였다든가, 원숙한 언어적 세련과 조탁의 의의를 후자가 소홀히 여겼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상당한 정도의 공통 부분을 인정하면서도 이들의 지향이 내포한 차이는 중시되지 않을 수 없다. 전고의 능숙한 운용과 언어적 세련을 중시한 이인로류의 시론이 보다 회고적, 보수적인 성향을 띤 데 비하여, <기,는 천에 근본한 것이니, 배워서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신의의 창출을 역설한 이규보의 비평은 고려 후기 신진사인층의 새로운 시의식을 촉구하는 논리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수사적 세련에 선행하는 주체적 근거의 강조는 이규보와 같은 때의 인물인 임춘에게서도 발견된다. 최자는 이규보의 입장을 수용하여 비교적 온건한 절충론을 제시하였으나, 기,의에 관한 논의 속에 성정의 개념을 도입하여 후일의 성리학적 문학론에 이어지는 실마리를 보였다.

  고려 말에 와서는 성리학의 수용이 문학비평에도 파ᅟᅳᆸ되어 도학적 문학론이 출현하였다. 이제현은 고문을 문장의 전범인 동시에 <성명도덕>의 표현으로 파악하고, 문학은 인륜의 도를 추구하는 방편으로서 존재 의의를 가진다고 했다. 이러한 과점은 성리학이 널리 뿌리내림과 함께 점차 화대, 정제되어 이색 및 그 문하의 인물들에 이어짐으로써 고려 말, 조선 초기 문학론의 근간으로 자리잡았다.


조선전기의 비평

  고려 말에 기본적 윤곽이 형성된 성리학적 문학관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더욱 심화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로 정도전을 들 수 있다. 이제현과 이색의 관점을 계승한 그는 문학을 <재도지기>로 보고, 시서예약의 가르침에 충실한 시,문을 가장 높은 이상으로 삼았다. 그에 의하면 사람은 나날의 모든 일에 있어서 마땅히 그 도를 다해야 하는 바, 이를 인식, 실천할 수 있는 의리가 본래적으로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다. 따라서 문학은 이에 충실함으로써 우주와 사회의 마땅한 질서를 구현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 자연의 형이상학적 원리와 인륜적 질서를 통합한 가치체계 속에서 문학의 당위적 지표를 파악하고자 하는 이론이다.

  이와 같은 문학론이 지배적인 위치를 유지하던 한편에서는 사장지문의 의의를 중시하는 입장도 공존하였다. 도학과 함께 사장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권근의 견해에도 이미 그러한 실마리가 보이거니와, 왕조 건국 이후 사대부 사회가 집권 사대부층과 재지 서림으로 분화되면서 전자 가운데서 사장 중시론이 좀 더 뚜렷한 모습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물론 사장지문을ㅈ ᅟᅮᆼ시한 문인들 역시 유자였으므로 재도지문의 기본 이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학의 형식적 측면과 전례 및 심미성을 중시하는 그들의 취향은 비평의 실제적 관심에서 상이한 성향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대표할 만한 인물인 서거정은 20여 년 동안 문권을 잡으면서 당대의 문풍을 주도하고 <동문선>을 편찬했으며 본격적 시화집인 <동인시화>를 저술하였다. 그는 도가 문에 선행한다는 전통적 명제를 수용하면서도 문학은 경국의 성업에 빛나는 문채를 더하여 불후의 명성으로써 후세에 남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에 문이 아니면 도가 드러내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전고의 능숙한 사용과 언어적 세련을 중요시한 수사론은 이러한 문학관의 소산이다.

  일반적으로 사장파라 불리는 위의 조류가 관ㄹ적 문인들의 세계에 터를 두었던 반면에 재지 사람 쪽에서는 이기, 심성에 관한 성리학설과 근본주의적 정치철학이 발달하면서 도학적 문학이론이 심화되었다. 16세기의 이황과 이이를 그 대표적 인물로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관도지문, 도본문말을 근본 명제로 삼는 점에서는 정도전 등 조선 초기와 논자들과 비슷하나, 문학의 의의를 경세적인 것에서보다는 성정의 도야라는 내면적 효용의 측면에서 강조한 점이 현저하게 다르다. 예컨대, 이황은 <문학을 어찌 소홀히할 수 있겠는가? 글을 배우는 것 또한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으며, 이이는 <시는 비록 공부하는 이가 즐겨할 만한 것은 아니나, 이로써 성정을 읊조리고 청화함을 펼쳐 통하여 마음 속의 더러운 찌꺼기를 씻어낼 수 있으니, 또한 존심성찰에 일조가 된다>고 했다.

  이이의 증최입지서는 이러한 문학의식의 이론적 구조를 가장 선명하게 집약한 문장이다. 여기에서 그는 <무극태극-천지-심-기-성>이라는 발생론적 체계와 <유용지성-미성-실성-선명>이라는 가치론적 구분 속에서 문학의 속성과 지표를 밝히고자 했다. 위의 논리적 연쇄 끝에 있는 <선명> 즉, 이상적인 문학은 우주적 생성, 운행의 근원적 무극태극이 사람의 심을 통하여 구현된 것이라 함이 그 요지이다.

  이와 같은 문학의식은 당연히 심미적, 사장파적 성향에 부정의 태도를 띠었고, 평담한 가운데서 맑고 드높은 심성의 함양을 추구하여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문학을 이상적인 것이라 여기는 비평론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중소지주로서의 기반을 토대로 향리에 정착한 재지 사대부층의 금욕적, 내면주의적 미의식의 논리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 비평의 주류가 이처럼 사림파 문학의 이론 구조를 정교하게 구축하기에 이른 단계에서 그 규범의 틀을 벗어나는 새로운 비평적 의식이 허균을 통해 제출되었다. 그는 시를 진실한 정의 표현이라 보아, 종래의 도학적 문학론자들이 주장한 바 <성정지정>의 윤리적 표준과는 다른 길을 택하였으며, 시적 체험의 진정성보다 외형적 수식에 치중하는 경향 또한 비판하였다. 아울러 그는 문장의 전범을 선진, 양한에서 구하는 상고주의도 부정함으로써 조선 후기 문학비평에로 이어지는 새로운 관점을 열었다. 그의 문설과 시변은 모든 시대의 문학이 각기 그 시대마다의 개성과 특징을 가지는 것이므로, 시인과 작가는 어떤 기성의 전범에 예속되어 모방만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창조적 개성에 근거해야 한다는 이론을 폈다, 이러한 견해는 고려 중기의 이규보와 18세기의 박지원, 이옥을 잇는 맥락의 한가운데에 놓인다고 할 것이다.


조선후기의 비평

  조선 왕조의 중세적 질서가 심각한 모순에 당면한 17세기 이래의 문학비평에서는 종래의 지배적 흐름을 벗어난 반정통적 조류가 다양하게 확산되었다. 그 전반적 내용은 아직 충분히 검증되어 있지 않지만, 정통적 성리학으로부터 이탈한 외학에의 관심이 문학비평에 직접간접으로 작용한 사실을 우선 주목할 만하다. 장유, 홍만종이 각각 양명학과 도가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탈정주학적 문학의식을 보인 점이 그 본보기이다.

  장유는 도학적 규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문학의 심미적 가치를 존중하였으나, 사장파와는 달리 그것을 문학의 외형에서 구하지 않고 작품 자체의 내면적 가치와 아름다움에 주목하였다. 홍만종은 문학의 본질과 가치를 논하면서 윤리 규범이나 외형적 수식을 모두 넘어선 <천득>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그는 역대의 시회 중에서 순수한 시화만을 집성하여 <시화총림>을 편찬함으로써 실제비평으로서의 시화가 정리되도록 했으며, 스스로도 <소화시평>을 저술하여 우리 한시에 대한 사적 서술과 비평을 전개하였다. 김만중은 홍만종과 더불어 국문문학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파악하여 사대부층 일각의 의식 변화를 보여주었다. 특히, 한문을 빌어 쓴 시,부로 우리의 경험과 느낌을 표현한다는 것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일과 마찬가지라고 한 김만중의 견해는 오랜 동안 한문문학에 매몰되었던 사대부적 태도에 반성을 촉구하면서 다음 단계의 국문문학 인식 발전에 선구가 되었다.

  한편 신분제의 동요와 함께 평민층의 문학 활동이 활발하여지자 시조집과 위항인들의 한시집이 엮어지고 국문문학, 시정문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전개된 점도 17세기 후반 이후 비평의 중요 현상이다. 18세기 초에 <청구영언>을 엮어낸 김천택, 이에 서발을 쓴 정윤경, <마약노초>, <해동가요>의 편찬자인 김수장, 그리고 <대동풍요서>를 쓴 홍대용 등은 시조를 풍아 즉 시경에다 비기면서, 민간의 진솔한 언어로 갖가지 경험, 감정을 노래한 시조야말로 본원적 진정성과 실감을 갖춘 문학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의식의 대두는 한문문학에 대하여 국어문학의 가치를, 상층문학에 대하여 하층문학의 존재 의의를 천명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상적 진전의 의미를 가진다. 또한 위항인들의 시집 편찬 취지를 발기흔 글들에서 홍세조, 고시언 등 위항인 자신과 일부 사대부 문인들에 의해서는 위항문학이 가식되지 아니한 성정과 체험의 진실한 표현으로서 학사, 대부들의 그것보다 고귀하다는 논리가 전개되었다. 도덕 규범에의 예속이나 수사적 세련보다 정감의 자연스러운 발현을 중시한 이들의 문학관은 이 시기 문학사의 탈중세적 지향이 명료한 의식형태를 띠기 시작한 징표로 이해된다.

  도학적 문학론이 요구하는 내면성에의 침잠이나 의고적 문학관 상고주의로부터 벗어나 문학을 당대적 경험의 충실한 표현으로 재인식하려는 노력은 진보적인 의식을 지닌 사대부 문인들에게서도 나타났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인물이 박지원과 이옥이다. 박지원은 문학의 형식과 실질 양면을 규제하는 고문의 초시대적 전범성을 부인함으로써 변화, 현실성, 개성의 이념을 도입하였다. 그에 의하면 고문이란 옛적에 있어서의 일상적 언어를 기록한 것으로서 참다운 문학의 길은 이미 화석화되어버린 옛말과 경험을 답습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정한 의미를 음미하면서 자신의 시대와 경험에 출실하는 데 있을 따름이다. 아울러 그는 중국적 전례에의 추종ㅇㄹ 비판하고 우리대로의 풍토와 역사, 문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 즉<조선풍>을 적극저긍로 평가하였으며, 개념적 직서적인 언어의 한계를 넘어 현실의 복잡한 양상을 우회적으로 반어적으로 조명하는 소설의 가치에도 주목하였다.

  이옥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비평문인 <이언인>에서 이러한 방향의 논리를 더욱 진전시켜, 하늘 아래 동일한 사물이 있을 수 없듯이 모든 시대와 지역은 각기의 절실한 요구에 따른 문학을 가지기 마련이라는 철저한 개별성의 선언으로써 중세적 보편과 상고의 이념을 부정하였다. 그는 작품과 비평 양면을 통해 정통적 사대부문학의 가치관과 주제를 거부하고 시정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적 삶을 중시하였다. 세상 만물을 살피는 데는 사람을 보는 것만한 일이 없으며 사람을 보는 데는 남녀의 정을 살피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다고 한 데서 그의 시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한문문학의 오랜 관습과 예교주의 통념을 타파하고 새로운 문학 세계의 당위적 근거를 제시한 그의 논리는 아마도 조선 후기의 문학론이 나아간 반중세적 의식의 가장 날카로운 극점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세적 실학자인 정약용은 이들과 또 다른 방향에서 조선 전기의 내면지향적 시의식을 극복하는 현실주의 시론을 추구하였다. 그는 문학이 그보다 더 우월한 상위의 가치 즉 도에 관한 구체적 파악에서 지향을 달리하였다. 정약용이 파악한 도는 16세기의 성리학자들이 생각한 바 존심양성의 내면지향적 가치보다 구체적인 삶과 사회, 정치적 차원에 있어서의 정의를 추구하는 데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관도지문>하는 비판적 기능을 중심으로 하여 시경을 해석하고 많은 사화시편을 썼으며, 문학이란 작자의 내면에 갖추어진 진지한 지의가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드러나는 사회적 언술의 산물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조선 후기 비평의 다양한 조류 쏙에는 이밖에도 더 밝혀져야 할 문제와 인물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앞으로의 풍부한 성과가 기대된다.


전환기의 비평

  조선 후기 비평의 추이는 문학, 예술 전반의 흐름과 더불어 탈중세적인 지향성을 뚜렷이 지닌 것이었으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일대 변환의 시대에 부응하여 새로운 문학 조류를 제어, 인도할 만큼의 통합성과 사회적 기반을 확보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구질서의 급속한 붕괴와 서구 문화의 충격을 체험하면서 문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구성이 모색되던 1900년대 이래의 비평을 편의적을 현대비평이라 통칭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현대비평은 극히 어려운 자기 갱신의 과제를 안고 굴곡이 극심한 역사를 거쳐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끔 조건지어졌다고 하겠다. 더욱이 식민지 지배하의 특징적 현상들ㅡ지난날의 문화에 대한 자기모멸적 부정, 서구 문명에의 일방적 경사, 보편성-예술성과 현실성, 역사성에 관한 지향의 분열 등은 이 시대의 비평이 주체적 근거 위에서 문학, 인간, 사회의 유기적인 연관을 파악하고 논리화하는 데에 심각한 제약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국 현대비평의 전체적 흐름을 파악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런 여러 문제들이 어떻게 갈등하고 결합되면서 남의 논리가 아닌 <나와 우리의 논리>로 진전되었는가를 해명하는 일이다. 서구 문학론의 수용 야상에 일방적으로 집착하여 현대비평의 주요 국면들을 설명하려 했던 소박한 발전론은 그런 뜻에서도 이제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비평의 첫 단계는 애국계몽기 혹은 개화기라 불리는 계몽적 이념의 시대이다. 이 시기에 출현한 신소설, 역사-전기류의 작가들과 진보적 유학 지식인들은 당대의 상황적 요구에 부응하는 문학의 효옹을 역설하였다. 박은식의 <서사건국지> 서문<논국운관문학>, 신채호의 <천희당시화, 이해조의 <화의 혈> 서문, 안국선의 <홍진회> 후기 그리고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등 이 무렵의 대표적 비평문장들 모두가 문학의 도덕적,사회적,정치적 효용성을 주지로 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들에 의하면 문학은 비근하고도 구체적인 경험에 호소함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깨우치는데 무엇보다 큰 효과를 발휘한다. 따라서 이를 통해 인심을 맑게 하고 풍속을 개량하여 사회,정치적 자각을 고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문학의 효용성을 중시한 유가적 관점이 역사 전환기의 절실한 요구와 결합한 결과이다. 창가와 신체시에 관하여는 이와 같은 논의가 별로 보이지 않으나, 그 바탕에 놓인 의식은 동일하였으리라 추정된다.

  1910년의 국권 상실 이후 일제에 의해 문학의 이념성이 억압되면서 위의 조류는 잠복하고 그 대신 주정주의적 문학론이 등장하였다. 그 대표적 논자였던 이광수는 <문학이란 하오>에서 인간의 정신이 지,정,의라는 세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학은 이에서 정의 요구를 표현, 충족하는 데 소임이 있다는 주정주의 이론을 주창하였다. 전통적인 유교문화에 대해 격렬한 거부의 시각을 지닌 그는 19세기까지의 문학과 비평이 인간의 지만을 존중하고 정을 낮게 봄으로써 잘못에 빠졌다고 하고, 유교적 도덕주의에 대한 반명제로서 일종의 정서적 생명주의를 새로운 문학의 지표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개화기의 문학론의 도덕적, 사회적 효용 지향은 부정되고, 대신 문학의 정서적 가치와 탈도덕적 자유 및 개성이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었다.(1920년대 초기 이후에 와서 그가 보인 상이한 입장은 물론 이와 별도로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몇ㅍ us의 문학론을 쓴 신채호는 이와 상반되는 입장에서 문학의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고 당대의 문학이 현실도피적 환각의 탐닉에 기울어지는 경향을 비판하였다. 이미 <천희당시화>에서 <동국시계 혁명>의 목표 아래 애국적 정치의식과 강건한 시정신의 합일을 제창한 바도 있는 그는 <근금소설 저자의 주의><낭객의 신년 만필>등의 시평을 통해 예술주의의 문예이든 인도주의의 문예이든 그 시대의 현실이 안고 있는 절실한  문제로부터 떠나서는 존재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입장은 유가 문학관의 전통에 연결되어 있으면서 그것을 당대의 현실적 문제들과 통합함으로써 문학의 사회적 소임을 중시하는 비평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1920, 30년대의 비평

  위와 같은 상이한 지향의 대립은 1920년대 초기의 낭만적-유미적 문학관과 사회주의 비평 사이의 갈등으로 이월되었다. 이광수의 초기 논설에서 예비적 단계를 거친 주정주의적 문학관은 1920년대 초기의 문학운동을 거치면서 박영희, 황석우, 김억, 박종화 등에 의해 낭만적 유미주의적 문학론으로 심화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 중엽에 이를 비판하며 등장한 신경향파-카프계열의 비평가들은 문학의 사회성과 투쟁적 기능을 중시하였다.

  초기에는 김기진,박영희에 의해 1920년대 말 이후에는 임화 등에 의해 주도된 프로 문학비평은 이전의 문학을 부르조아적 사치와 허위의식의 산물이라 비판하고, 모든 예술행위의 계급성을 전제로 하여 계급의 해방을 위한 문학의 소임을 비평적 관심의 핵심으로 삼았다. 한편 이광수, 염상섭, 김억 등은 각기 다른 입장에서 문학의 예술적 자율성, 혹은 계급에 우선하는 민족의 일체성을 논거로 하여 이에 대응하는 논리를 모색하였으며, 별 소득은 없었지만 양주동 등에 의해 절충론이 시도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 비평은 문학의 본질,기능 및 평가 규준에 관한 논쟁을 겪음으로써 본격적인 현대비평으로서의 문제의식에로 접근해 갔다. 그러나 다시의 비평 자체는 관념적 논리에 지배된 나머지, 대립의 양면에서 모두 문학 인식의 구체성이 부족한 도식주의나 인상주의에 빠진 예가 많았다.

  김기진의 평론 <문예시평>을 도화선으로 하여 일어난 <내용-형식 논쟁>은 이 시기의 가장 날카로운 비평적 쟁점과 갈등을 보여준다. 이 논쟁에서 김기진은 문학이 관념(투쟁의식)만으로 성립할 수 없고 마땅히 내용에 상응하는 예술적 유겣를 갖추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반면에 박영희는 일정한 과도기에서는 내용과 의식이 형식상의 고려로부터 독립하여 선해애향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상황적 요인에 의해 후자의 정당성이 카프 안에서 공식화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으나 그 근본적 숙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1930년대의 창작방법론적 논쟁,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논쟁 등으로 이월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이른바 <외부적 정세의 악화>와 함께 프로 비평의 흐름이 현저하게 쇠퇴되고, 박용철, 김환태, 김문집 등 문학의 자율성, 심미성과 내적 세련을 중시하는 비평가들의 활동이 확대되었다. 이들의 관점은 1920년대 초기의 낭만적, 유미적 문학론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면서, 1920년대 중엽 이래의 프로 비평이 보여 온 이념적 도식주의에 대한 반작용의 의미를 띤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문학이 다른 어떤 것에도 예속되지 않는 자립적 정신활동의 산물이며, 따라서 외재적 규준을 통해 문학에 목적성을 부과하고 그에 맞추어 작품을 해석 평가하는 것은 비평의 마땅한 방법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 대신 이들은 시인,작가의 개성, 창조의 신비, 정련된 언어, 그리고 감각적 경험의 아름다움 등을 중시하였다. 이 점에서 그들은 대체로 심미주의적 비평의 계열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특히 김환태)은 문학의 예술성에 대한 개인적 체험과 감응의 소중함을 강조한 나머지 흔히 인상주의적 비평으로 기울어졌고, 가치평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프로 비평의 교조적 객관주의에 대조되는 주관주의에로의 치우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이들보다 조금 늦게 등장하여 1930년대 중엽부터 중요한 활동을 보인 최재서, 김기림은 현대 영미비평의 경향을 소개, 원용하면서 김환태류의 주관주의적 경향과 프로 비평의 도식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튺히 최재서는 문학을 사회적 리얼리티의 탐구이자 가치추구의 행위라 보고 비평의 판단적 직능을 중시하여 문학의 예술적 가치와 사회적,윤리적 가치를 통합하는 이론 구성을 모색하였다. 김기림은 시인이자 시론가로서 활동하면서 일반적 체계를 지향하는 이론보다는 모더니즘, 이미지즘 운동의 제창과 시에 관한 실제비평적 작업에 치중하였다.

  일제 지배세력에 의한 1930년대 초의 탄압으로 카프가 해산된 이후에도 프로 문학의 기본 입장을 유지하던 임화, 김남천 등은 1930년대 중엽 이래 예전의 교조적 이념주의를 지양하는 비평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 내용은 매우 다양하나 임화의 낭만주의, 리얼리즘론, 신문학사 연구 등과 김남천의 장편소설론, 그리고 많은 작가,비평가들이 참여한 대중화논쟁이 특히 주목된다. 이들을 포괄한 1930년대 비평의 상세한 내용을 구명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손대야 할 문제들이 많고 그 일부는 활발한 논의에 불편이 따르는 형편이다. 그러나, 어떤 입장에서 보든 이 시기가 한국 현대비평사에서 가장 다채로운 논쟁과 모색의 연대였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광복 이후의 민족문학 논쟁과 비평

  모든 논리가 일제 군국주의의 폭력 아래 압살되었던 1940년대 전반을 지나 광복을 맞이한 문학비평은 당시의 모든 사회, 문화 영역이 그러하였듯이 치열한 이념적 갈등에 부딪혔다. 뿐만 아니라 비평은 그 자체의 논쟁적 속성으로 인하여 가장 날카로운 대립의 칼날이 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비평적 쟁점은 해압된 조국의 터전에 절실히 요망되는 민족문학의 지표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있었다. 통념적 이해에는 이에 대한 당시의 견해들을 우익(민족주의 진영)과 좌왹(사회주의 진여여)의 두 갈래로 양분하나, 사태가 반드시 그렇게 단순하였던 것만은 아니다. 이른바 민족주의 진영의 논객들 가운데는 예술의 순수성, 보편성에 충실하는 것만이 민족문학의 길이라는 입장을 지닌 이들이 있었던 한편, 민족이 당면한 대내외적 모순의 극복을 위해 문학이 적극적인 현실의식과 통합의 전망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논자들도 있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논자들 사이에서는 또 계급혁명과 민족혁명의 관계, 우선순위의 해석과 민족문학의 담당 주체 ᄑᆞᆨ 문제를 놓고 적어도 구 갈래 이상의 상이한 전망이 갈등하였다. 대립이 날카로우면 날카로운 대로 그 지양을 통하여 보다 나은 결실을 기대함직하였던 이 쟁론은 그러나 남북 분단이 고착되면서 정치, 사회적 조건에 의하여 소멸되었다. 그 결과 우익 진영의 민족문학론에서는 문학의 순수성, 보편성을 강조하는 주장이 정통의 자리를 차지했고, 들리는 바에 의하면 북한 쪽에서는 민족혁명과 포용적 민족문학의 우선적 필요성을 주장하던 논자들이 다른 정치적 등기와 함께 숙청되었다고 한다.

  1950년대에는 이와 같은 외적 요인에 의한 비평 집단의 단순화와 6.25 이후의 지적 황폐화로 인하여 일부 실제비평적 성과를 제외하고는 뚜렷한 진전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비하여 1960년대는 4.19의 역사적 체험을 바탕으로 그간의 문화상황과 현실에 대한 반성적 인식이 확대되면서 비평 또한 얼마간의 활기를 되찾게 된 시기라 할 수 있다. 영미 신비평의 수용과 더불어 형식주의적 비평이 등장하고, 문학의 사회적 의미와 기능에 대한 관심이 새로이 떠오르면서 순수-참여 논쟁 등의 형태로 비평적 쟁점이 날카롭게 부각된 것을 특히 주목할 만하다. 1960년대 말 경에는 서구문학과 그 이론에의 편향에 대한 회의적 관점이 일어나고 전통의 정당한 인식, 계승, 극복을 둘러싼 문학사적 논의가 계속됨으로써 문학비평의 주체적 정향에 관한 물음이 또 하나의 과제로 제출되었다.

  1970년대의 비평은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 위에 사회,정치적 상황의 긴장이 가중됨으로써 비평적 전제와 이론구조의 차이가 좀더 날카롭게 부각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문학을 하나의 심미적 우주 내지 닫혀진 체계로 보는가 혹은 현실공간을 향해 열려 있는 의미체로 보는가 하는 논란은 이미 훨씬 전부터 있어 온 것이지만, 열려 있는 의미체로서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각의 차이가 나타났다. 70년대 문학비평의 주요 조류를 결집하고 움직이는 데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던 두 계간지 <<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지성>>의 특징적인 성격은 바로 이 점에서 당대의 비평이 모색하였던 바를 대표할 만하다. 소시민문학론, 시민문학론, 리얼리즘 논쟁, 민족문학론, 민중문학론 등 광범한 진폭을 가진 이 시기의 주제들과 그 밖의 많은 비평적 성취를 여기에 대강이나마 소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또 굳이 어설픈 요약의 필요를 느끼지 않을 만큼 그 대부분의 문제는 우리가 속한 이 연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점은 1970년대에 있어서의 풍부한 비평적 활력과 성취는 평온한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극도의 현실적 긴장 속에서 문학과 사회 및 인간존재의 있어야 할 모습을 해명하려는 실천적 모색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속한 오늘의 연대에도 기본적으로 연속되는 책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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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규 선생님의 한국문학의 이해에 한자가 많아서 공부하기 어려워하는 분들을 위해서 제가 독음 파일을 보고 직접 타이핑한 텍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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