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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경전>

 



화설 태종황제(太宗皇帝) 시절에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표기장군(飄騎將軍) 정국공이란 재상이 있으니 문무겸전(文武兼全) 하기로 조정(朝廷)에 공경추앙(恭敬推仰)하며 명망(名望0이 일세(一世)에 들레나 다만 슬하에 일점혈육(一點血育)이 없어 슲어하더니 하루는 공이 그 부인(婦人) 양씨를 대하여 왈, 우리 부귀(富貴) 일세에 으뜸이로대 조전향화(祖前香火)를 어찌 하리오 내 벼슬이 공후(公侯)에 거함에 족히 두 부인을 두엄직 한지라 행여 생자(生子)하면 후사(後事)를 이을 것이니 부인 소견(所見)이 어떠하뇨 부인이 탄왈(歎曰), 첩이 전생(前生)에 죄 중하여 일점혈육이 없으니 상공 재취(再娶)하심을 어찌 애초로이 할 배 있으리까? 말을 마침에 옥안에 쌍뉘종횡(雙淚從橫)하니 상서 이를 보니 불쌍 측은하여 부인을 위로(慰勞)할 따름이더라 이날 부인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시녀(侍女)를 다리고 추앵에 올라 월색(月色)을 구경하더니 이 때는 삼월망간이라 부인이 난간(欄干)에 의지하여 잠간 졸더니 문득 동다이로서 오색 구름이 이러나며 두 선녀(仙女) 공중(空中)에서 나려와 부인을 보고 벽녁화 한가지를 주며 왈, 부인이 우리를 아르시나이까 상제(上帝)께옵서 우리를 보내여 부인에 화물을 드리라 하시기로 이 벽녁화를 부인께 드리나이다 하고 부인 앞에 놓고 홀연(忽然) 간데 없거늘 부인이 놀라 깨다르니 한꿈이라 남천(南天)을 향하여 무수이 사례(謝禮)하고 돌아보니 벽녁화 있거늘 부인이 고이 녀겨 구경코저 하더니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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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 광풍(狂風)이 일며 그 꽃을 낱낱치 떨어치는지라 부인이 나려와 상서께 이 말씀을 전하니 상서 청파에 해몽(解夢)하니 반드시 생자지상(生子之相)이라 가장 기꺼하더니 과연 그달부터 잉태(孕胎)하여 십삭(拾朔)이 참에 하루는 공중에서 한쌍 선녀 나려와서 부인 침전(寢前)에 이르매 월궁항아(月宮姮娥)의 명으로 해복(解腹)하심을 기다리 나이다 하니 오색구름이 집을 옹위(擁衛)하고 향수진동(香水振動)하거늘 부인이 생아(生兒)하니 선녀 향수(香水)로 씻겨 누이고 이르되 이 아이 이름은 수경이오니 차알 배필(此兒配匹)은 황성(皇城)에 있으니 때를 잃지 마옵소서 하고 문득 간바를 아지 못하더라 이때 상서 바삐 드러와 보니 부인은 정신을 잃고 한 아이 곁에 누었거늘 상서 일변 부인을 붙뜨러 구하며 아이를 보니 진짓 월궁고아라 상서 즉시 생일일시(生日日時)를 기록(記錄)하고 이름을 수경이라 하더라 이러구러 세월(世月)이 훌훌하여 수경의 나이 오세에 이르매 태천업이 날로 새로우니 상서부부 장중보옥(掌中寶玉) 같이 애지중지(愛之重之)하니라 이때 장운이란 사람이 있으니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고 한 아들을 두었으니 얼굴은 두목지(杜牧之) 행실(行實)은 증자(曾子)를 호흔하더라 상서 조회(朝會)를 파하고 돌아오니 병부상서 정국공을 만나 서로 례를 파하고 장상서왈(張尙書曰) 현형은 모르미 소제의 집으로 가심이 어떠하시나이까 정상서(鄭尙書) 흔연 허락(許諾)하고 한가지로 장상서 부중에 이르니 경풍각에 좌정(座定)하여 주찬(酒饌)을 나와 대접(待接)할 제 정공(鄭公)이 소왈(笑曰) 형의 부귀로 어찌 일배주(一杯酒)로 박히 대접하나뇨 장공이 소왈 형은 이백의 후신인 자주 배탑하기를 잘하는도다 하며 즉시 시녀를 명하여 주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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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올새 술이 반취함에 정상서왈 청컨대 형의 귀자(貴子)를 한번 구경코저 하노라 장상서 즉시 공자(公子)를 부르니 공자 수명(受命)하고 즉시 이렀거늘 정공이 잠간 보니 진짓 영풍호준이라 일견(一見)에 대희왈(大喜曰) 내 일즉 한 여식(女息)을 두었으니 나이 십세라 진짓 차인(此人)에 배위(陪衛)로다 우리 양인(兩人)이 이렇듯 심밀(深密)한 가운데 가히 슬하에 자미를 보음즉 한지라 가히 배우(配偶)를 정함이 어떠하뇨 장공이 답왈 형이 이에 먼저 청혼(請婚)하시니 불승 황공하여이다 정상서 칭사한데 장상서 백옥홀을 내여다가 정상서를 주며 왈 차물(此物)이 비록 대단치 않으나 선조(先祖)부터 결혼시(結婚時)에 신물을 삼었아오니 이로써 정약(情約)하나이다 정상서 또한 쥐었든 청파를 주며 왈 이로써 표정 하소서 하고 인하여 파연(罷宴)하매 정상서 집에 돌아와 보인다러 정혼한 사연을 이르더라 이때 예부상서 진공이란 사람이 있으니 황제(皇帝) 가장 총애(寵愛)하시니 진공이 양양자득(揚揚自得)하고 교만방자(驕慢放恣)한지라 정상서 일찍 진공이 소인(小人)인줄 알고 태종께 사뢰고 간하다가 태종이 종시(終始) 불연(不然)하심에 진공이 이 일을 알고 정공을 해코저 하더니 차시(此時) 마침 태종의 탄일(誕日)이 되였는지라 만조 모두 조회하더니 마침 정상서 병이 있어 상소(上疏)하고 조참지 못하였더니 황제 백관더러 문왈 정상서의 병이 어떠하더뇨 하시고 사관을 보내시려 하시니 진공이 출반주왈(出班奏曰) 국공은 간악(姦惡)한 사람이라 그 병세(病勢)를 신이 자세이 아니이다 국공이 요사이 탑전(榻前)에 조회하는 것이 다르옵고 신이 국공의 집에 가보니 국공의 말이 수상하옵더니 오늘 조회에 불참하오니 반드시 사고(事故) 있는 줄 아나이다 상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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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驚)하사 벌로 처지 하려 하시거늘 중관이 주왈 정국공의 죄 명백(明白)함이 없아오니 어찌 중히 다스리기에 미치오리까 상이 경아(驚訝)하사 절강에 귀양을 정하시니 중관이 명을 듣고 정국공의 집에 나아가 하교(下敎)를 전한대 상서 하교를 듣고 대곡왈(大哭曰) 내 일찍 국은(國恩)을 갚을가 하였더니 소인에 참언(讒言)을 입어 이제 찬출(竄黜)을 당하니 어찌 애닯지 않으리오 하고 칼을 빼어 서안을 처왈 소인의 무리를 소제(掃除)치 못하고 도리어 해를 입으니 누를 원망하리오 하며 체읍(涕泣)하기를 마지 않으니 부인은 애원통도(哀怨痛悼)하고 친척노복(親戚奴僕)이 다 슲어 하더라 사관이 재촉왈 황명(皇命)이 급하오니 수이 행장(行裝)을 차리소서 공이 일변 행장을 준비하여 부인더러 왈 나느 천만에 의외에 적객(謫客)이 되어가거니와 부인은 여아(女兒)를 다리고 조선향화를 받드러 기리 무양(無恙)하소서 하고 즉시 발행(發行)할새 부인모녀(母女) 흉격(胸膈)이 막혀 아무말도 못하더라 정공이 여러날 만에 적소(適所)에 이르니 절강 만회 관사를 쇄소(灑掃)하여 상서를 머물게 하더라 차설(此說) 정공이 적거(謫居)한 후로 슬픔을 머금고 세월을 보내니 삼삭(三朔)만에 홀연 득병하여 여러날 신고(辛苦)하다가 마침내 세상을 영결(永訣)하니 절강 만회 칙은이 여겨 나라에 장계(狀啓)하고 부인께 기별하니라 이때 부인과 소저 상서를 이별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더니 하루는 문득 시비 고하되 절강사람이 왔나이다 하거늘 부인이 급히 불러 물으니 거인왈 상서께서 거월망간에 기세(棄世)하시다 하는지라 부소저저서 이 말을 듣고 한마디 소리에 혼절(昏絶)하니 시비 등이 창황망조(蒼黃罔措)하여 약물로 급히 구함에 오랜 후에야 숨을 내쉬며 눈물이 비오듯 하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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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소저 나이 십일세라 일가 모두 통곡(痛哭)하며 산천(山川)이 다 슬퍼 하더라 선시(宣示)에 천자(天子) 상서의 죽음을 들으시고 측은이 여기사 즉시 하교하사 증직(贈職)하시며 왕후례(王后禮)로 장사(葬事)하라 하시더라 차설(此說) 이때 부인과 소저 주야애통(晝夜哀痛)하며 상서 영구(靈柩) 돌아오기를 가디리더니 홀연 부인이 득병하여 상석에 위독(危篤)한지라 소저 더욱 망극(罔極)하며 낯을 부인 옥안에 대이고 울며 왈, 부친(父親)이 만리절역(萬里絶域)에서 기세하시고 또 모친(母親)이 이렇듯 하시니 소녀 누를 의지하여 부친 영구(靈柩)를 받드러 안장(安葬)하며 인명을 어찌 보전하리요 하고 언와에 실성 체읍 하는지라 부인이 혼혼중에 여아의 곡성(哭聲)을 듣고 오열(嗚咽) 장탄왈, 상공의 시신을 미처 거두지 못하고 내 또한 죽기에 이르니 내 죽기는 설지 않거니와 네 경상(景狀)을 생각(生覺)하면 구천(九泉)에 원혼(冤魂)이 되리로다 하고 애호일성(哀呼一聲)에 명이 진하니 소저에 호천벽용(呼天擗踊)하는 형상은 초목금수(草木禽獸)라도 슬퍼할지라. 부인 시체(屍體)를 부용정에 빈소(殯所)하고 주야 통곡하더니 절강 만회 정공이 상구를 모셔왔거늘 소저 부친 현구를 붙들고 애곡(哀哭)한 후 정당에 빈소하고 주야 관을 두다려 통곡하여 이렇듯 세월이 여류하여 장일(葬日)이 다다르매 례관이 황명으로 시구를 붙드러 왕례로 장사하니라. 이때 장공이 정상서 부인마저 죽음을 듣고 소저의 정상을 공측히 여겨 자주 왕래하며 소저의 안부(安否)를 탐문(探聞)하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장공이 또한 득병하여 마침내 세상을 바린지라. 소저 듣고 장탄왈, 우리 부친 생기 언약(言約)을 굳게히고 피차 신물을 받았으니 나는 곧 그 집 사람이라 내 팔자 기박(奇薄)하여 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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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또한 기세하여 계시니 어찌 무엇을 도모 하리오 하고 슬퍼 하더니 문득 한 계교(計巧)를 생각하고 유모(乳母)를 불러 의논(議論)한 후 항상 남복(男服)을 개착(改着)하고 밤이면 병서(兵書)를 읽고 낮이면 말달리기와 창쏘기를 익힘에 용맹(勇猛)과 지략이 일세에 무쌍이라 차설 장연이 삼상을 마침에 왕부인이 아자더러 왈, 네 이미 장성 하였으니 과업(課業)을 힘쓰라 한대 연이 수명하고 주야로 힘쓰더니 이때 상이 인재(人才)를 얻으려 하사 예부에 하교하여 택일설과하시니라. 과일(科日)이 다다르매 장연이 과장(科場)에 들어가 글제를 살핀 후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받치고 배회(徘徊)하더니 장원(壯元)에 장연이라 호명(呼名)하거늘 장연이 옥폐(玉陛)에 나아가 사배하온대 상이 인견(引見)하사 왈, 네 아비 충성(忠誠)으로 나를 섬기더니 일찍 죽으매 짐이 매양(每樣) 충직(忠直)을 아끼더니 네 이제 방목(榜目)에 참례(參禮)함을 다행함을 아노라 하시고 인하여 한림학사를 제수(除授)하시니 사은(謝恩)하고 부중으로 돌아오니라 차설 장한림이 삼일 유과 후에 선영(先塋)에 소분(掃墳)하고 직임에 나아갔더니 해바꾸임에 한림이 과궐이 만흠으로 상포하여 별과를 청하거늘 상이 의윤하사 택일 설과하신대 이때 정수경이 과거(科擧) 기별을 듣고 과구(科具)를 차려 황성에 들어가니 과일이 다달았는지라 과장에 나아가 글을 지어바치고 나와 쉬더니 상이 한 글 정장을 빼내시니 문필(文筆)이 탁월(卓越)함을 대찬(大讚)하시고 비봉을 떼이시니 국공의 아들 정수경이라 즉시 인견하사 진퇴하신 후 하교 왈, 정흠이 아들이 없다 하더니 이같은 기자 둠을 몰랐도다 하시고 의아(疑訝)하시더니 문득 진량이 주왈, 정흠이 본래 아들이 없음을 신이 익히 아옵는 배라 연하여 정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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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기망하옵고 정흠의 아들이라 하오니 폐하는 살피소서 하거늘 정수경이 제 부친을 해하던 진량인줄 알고 불승분노하여 왈, 네 국가를 속이고 대신을 모해하든 진량이냐 무슨 원수로 우리 부친을 해하여 만리절역에서 죽게 하고 이제 나를 또 해코저 하며 가충부대라 하니 천륜이 어찌 중하거던 모륜패상을 하는 말을 군부지전(君父之前)에서 하는가 이제 네 간을 씹고저 하노라 하며 눈물이 비오듯 하거늘 상이 수경의 말을 들으시고 진량이 간흉함을 깨달으사 왈, 너같은 것이 중양지신을 애매이 죽게하니 짐에 불명함을 뉘웇노라 하시고 법관(法官)을 명하여 진량을 강서에 찬출 하시고 정수경을 한림학사 겸 간의태부를 제수하시니 수경이 사은하고 삼일유과후 말미를 얻어 선산(先山)에 소부하고 즉시 상경하여 천자에게 숙사(肅謝)하고 나오매 장연이 정수경을 보고 피차 한원[한훤寒喧]을 마친 후 장연 왈, 전일(前日) 우리 부친과 영대인이 서로 언약하여 소제와 영매(令妹)로 더부러 결혼하였더니 피차 불행하여 초토(草土)에 있기로 혼사를 의논치 못하였거니와 이제 우리 양인이 새로이 만남에 수이 택일(擇日) 성례(成禮)코저 하나니 형의 뜻은 어떠하뇨? 정수경이 옥안에 잠간 수색(愁色)을 띠여 왈, 소제 가운(家運)이 불행하와 부모 낙망하심에 주야통곡 하다가 병이 이러 세상을 버림에 할반지통이 날로 더하더니 금일 형의 말을 들으니 새로이 슬프도다. 장연이 청파에 아연탄식 왈, 연즉 어찌 진시 통부를 않었나뇨? 수경 왈, 그때를 당하여 비황중에 념불급타 함이니 금일 형에게 통부전치 아니한 허물은 면치 못 하리로다 하더라. 차설 하루는 상이 경풍루에 정좌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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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장양인(鄭張兩人)을 명초(命招)하사 왈, 경등이 시부(詩賦)를 지어 짐에 적요함을 소창(消暢)케 하라 하신대 양인이 응명(應命)하고 지필을 취하니 때는 정이 삼월 망간이라 시흥(詩興)이 반양하야 산호필을 들어 일필휘지하여 일시에 바치니 상이 보신즉 시지 민첩하고 경물이 구비하여 진선진미(盡善盡美)함에 칭찬불니 하시고 특별히 장연으로 대사도를 삼고 정수경으로 자정전 태학사를 하이시니 각관이 주왈, 그 장정 양인에 재주는 비상하오나 년기최소(年期最少)하오니 그 직임이 과할가 하나이다. 상이 진노하사 왈, 년기최소로 벼슬을 할진대 재주 고하(高下)를 의논치 말미 옳으냐 하시고 다시 정수경으로 병부상서 겸 포기대장 병마총독을 하시고 장연으로 이부상서 겸 대사도를 하이시니 양인이 감당치 못 함으로 구지 사양(辭讓)하되 상이 종시불윤(終始不允)하시고 화대 하시니 양인이 할 일없이 사은하고 각각 부중으로 돌아오니 장상서 모부인을 위로하며 인하여 정수경의 누이 사연을 고하니 모부인 참연 왈, 제 이미 죽었으면 가히 타처(他處)에 숙녀(淑女)를 구하여 기궤를 비우지 말게 할지어다. 상서 들을 만할 따름이더라. 각설 각노 위승상은 내내 공후묘에 오가로 부귀일세 으뜸이나 늦게야 다만 일녀(一女)를 두었음에 침어낙안지용(沈魚落雁之容)이 일대 가인(佳人)이라 소저 방년(芳年) 십육임에 부인 장씨 각노께 고왈, 바삐 가랑을 구하여 저의 쌍유함을 보고 우리 후사를 맡겨 노래(老來) 자미를 봄이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까? 각노왈, 이부상서 장연이 인물풍도와 명망재현 일세에 추앙하는 바니 청혼하리라 하고 즉시 매파(媒婆)를 강부에 보내여 통혼한대 강씨 익히 아는 배라 즉시 허락하여 보내고 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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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빙한 후 성례할세 상서 나이 또한 이팔이라 위의를 차려 원부에 나아가 홍안을 전하고 내당에 들어가니 각뇌 부부에 즐김은 일으지 말고 만당 빈객(賓客)이 칭찬하는 소리 진동하더라. 이윽고 여러 시녀들이 신부를 옹위하고 나오니 상서 잠간 본즉 맑은 용모와 아름다운 자태 진실로 일세에 희한한 여재(女才)더라. 양인이 교배(交拜) 마침에 이미 일모서산(日暮西山)한지라 시녀 상서를 인도(引導)하여 침실에 나아가 서로 좌를 이루니 소저 옥안(玉眼)에 잔잔 수색(愁色)을 띄여 아미(蛾眉)를 숙이고 단정히 앉았음에 상서 심히 기꺼하며 즉시 초불을 물리고 소저 옥수(玉手)를 잡아 금리에 나아가니 그 경권지정이 비할 때 없더라. 명조(明朝)에 상서 본부에 돌아와 사묘에 배알하고 모부인(母夫人)에게 뵈온대 부인이 희색(喜色)이 만면 하더라. 각설 강서도독 한복이 상표 하였으되 북방 오랑캐가 기병(起兵)하여 관북 칠십여 성을 항복 받고 어남태수 장보를 참하고 병세(兵勢) 호대하다 하였거늘 상이 대경하사 문무(文武)를 모아 의논할 때 제신이 주왈, 정수경이 문무겸비 하였고 벼슬이 또한 표기장군이오니 가이 적병을 막으리라. 상이 정수경을 명초(命招)하라 하시니 이때 정수경이 재배하여 조현하되 상왈, 이제 북적이 침범(侵犯)하여 위급하다 함에 이 소임(所任)을 당할소냐. 상서 부복조왈, 신이 비록 무재하오나 신자되여 이때를 당하여 피하리잇고 간뢰드지 하와도 도적을 파하여 폐하의 근심을 덜이이다. 상이 대희하여 즉시 정수경으로 평북대원수(平北大元帥) 겸 제도병마도총 대도독을 하이시고 인검을 주사왈, 제후라도 만일 위령하여를 선참후계하라 하신대 원수 사은 수명하고 주왈, 군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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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군이 있어야 군정을 살피옵나니 어찌 하리잇고? 상왈, 연즉 경이 택출하라 하신대 원수왈, 이부상서 장연이 그 소임을 감당할까 하나이다. 상이 즉시 장연으로 부원수를 삼으신대 원수 물러나와 진국장군(鎭國將軍) 관영으로 십만병을 조련하라 하고 인하여 궐하에 하직하고 교장에 나아가 중군 장연에게 전령하여 빨리 진상으로 대령하라 하고 제장에게 군례를 받은 후 관영으로 선봉장(先鋒將)을 삼고 양주자사 진시회로 중군장(中軍將)을 삼고 대장군(大將軍) 서래로 군량총독관을 삼으니라. 이때 중군전령이 장상서 부중에 이르니 상서 마음에 가장 불호하나 임의 국가대사(國家大事)요 군중 호령이라 장령을 거역지 못하여 모부인께 하직하고 갑주(甲冑) 갖추고 말에 올라 교장에 나아가니 원수 갑주를 갖추고 장대에 높이 앉아 불러 드리니 장연이 들어와 군례(軍禮)로 꿇어 뵈는지라. 원수 내심(內心)에 반갑고 실소하나 외모(外貌)를 엄정이 하고 왈, 이제 적세(敵勢) 급하였음에 명일(明日) 행군(行軍)하여 기주로 가리니 그대는 평명에 군사를 영솔하여 대령하되 군중은 사정이 없나니 창념하라 한 대 중군이 청령하고 물러나니라. 차설 원수 행군하여 기주에 다다르니 적세 호대하다 하거늘 명조에 진세(陣勢)를 벌리고 적진에 격서(檄書)를 보내여 싸움을 도두니 호장 마웅이 또한 진문을 열고 정창 출마하거늘 원수 도채를 들어 대매 왈, 무지한 오랑캐 전시를 모르고 무단이 기병하여 지경을 침노함에 황제께서 대노하여 왈, 너의를 소멸(消滅)하라 하시니 빨리 목을 느리여 내 칼을 받더라. 마웅이 대로(大怒)하여 맹달통을 대적하라 하니 맹달통이 팔십근 도채를 두루며 말을 내몰아 꾸짖어 왈, 너같은 서생(書生) 유추 어찌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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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당할소냐 하고 진을 헤치고저 할 지음에 송진선봉 관영이 내다러 교봉(交鋒) 십여합에 맹달통이 크게 고함하고 도채로 관영에 말을 처 엎지르니 관영이 마하(馬下)에 떨어지는지라 원수 관영이 위급함을 보고 급히 뛰여드러 왈, 적장(敵將)은 나의 선봉을 해치지 말라 하고 달여드러 맹달통을 맞아 삼합이 못하여 원수의 창이 번득하며 맹달통을 찔러 마하에 나리치고 그 머리를 베어 말에 달고 도리어 쳐 들어가니 마웅이 맹달통의 죽음을 보고 중군에 들고 나오지 않거늘 원수 적진 전면을 헤치며 좌충우돌하여 중군에 이르나 막을자 없더니 문득 적장 오평이 원수에 충돌함을 보고 방천극을 두루며 높이 내달아 싸와 삼십여 합에 문득 적병이 사면으로 급히 쳐 들어오는지라 원수 오평을 버리고 남녘을 헤쳐 달아날새 마웅이 기를 두르고 북을 울리며 군사를 재촉하여 철통같이 에워쌌는지라 원수 대노하여 좌수(左手)에 장창(長槍)을 들고 우수(右手)에 보검(寶劍) 들어 동남을 짖치니 적진장졸(敵陣將卒)의 머리가 추풍낙엽 같이 떨어지는지라. 적병이 저당치 못하여 사면으로 헤어짐을 마웅이 이를 보고 왈, 조고만한 아이를 에워도 잡지 못하고 도리어 장졸만 죽이니 이는 하늘이 나를 망케 하심이다하고 혼절하더라. 강서도옥 한복은 당시 영웅이라 원수의 쌓임을 보고 대노하여 철기 오백을 거느려 쌓인 데를 헤쳐 원수를 구하여 나오니 뉘감히 당하리요 본지능로 돌아와 승정고를 울리며 장졸의 기운을 돋우며 한복과 관영이 원수께 사례왈, 원수의 용맹은 조례왕이라도 미치지 못하리로소이다 하더라. 차설 마웅이 패잔군을 수습하여 물을 건너 진을 치고 오평으로 선봉을 삼으니라. 이때 원수 장대에 앉고 제장을 불러 왈, 이제 마웅이 물건너 결진함은 구병 청함이니 만약 이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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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파라리라 하고 한복을 불러 철기오천을 거느려 흥양중에 숨었다가 적병이 패하면 그리로 갈 것이니 급히 내달아 치라 하고 기주자사 손경을 불러 정병 오만을 거느려 불로 치되 여차여차 하라 하고 선봉 관영을 불러 왈, 너는 삼천 철기를 거느려 여차여차 하라 하니 제장이 청령하고 각각 군마를 거느려 가니라. 원수 황혼에 군사를 밥먹인 후 제장으로 본진을 직히고 철기 모두 물을 건너 적진으로 행할새 이때는 정히 삼경이라 적진에 등촉이 다 꺼지고 준비함이 없거늘 사면을 살펴본 즉 산천이 험악하고 길이 좁은지라 원수 심중에 일히하여 한소리 포향에 사면에서 불이 일어나 화광(火光)이 중천하고 금괴 제명하며 함성이 천지진동하는지라 적장이 크게 놀라 진밖에 내다르니 화광이 년천한데 소멸대장이 칼을 들고 좌우 충돌하니 마웅이 무심중에 황급하여 칼을 두루며 불을 무릅쓰고 앞을 헤칠 지음에 등뒤에서 손경이 장창을 들고 말을 달려 짖쳐 들어오고 앞에 원수 또 칼을 들고 가는 길을 막으니 적장이 비록 지용이 있으나 이미 계교에 속았는지라 다만 두미(頭尾)를 모르고 살길만 도모하여 좌우를 헤칠새 원수 급히 마웅에게 달아들어 십여 합에 이르러는 함성이 대작하여 천지진동하는지라. 마웅이 세 급함을 보고 좌편으로 달아나더니 부원수 장연이 길을 막고 활을 쏘며 마웅이 몸을 기우려 피하며 분연이 장연을 취하더니 문득 원수 창을 두루며 뒤로 달려들어 마웅을 베이니 오평이 마웅의 죽음을 보고 상혼낙담(喪魂落膽)하여 겨우 명을 도망하여 한뫼를 넘어 흥양으로 바로 닷더니 앞에 함성이 일어나며 일표군마 내달아 오평을 사로잡으니 이는 위수대장 한복이라. 차시 좌충우돌하니 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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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졸이 일시에 항복함에 손경으로 하여금 압령하여 본진으로 돌아오니 한복이 또한 오평을 잡아 왔는지라 원수 장대에 높이앉고 오평을 잡아드려 계하에 꿀리니 오평이 눈을 부릅뜨고 무수질욕 하거늘 원수 대로하여 오평을 베이니라. 원수 호병을 멸하고 첩서를 조정에 올린 후에 대군을 휘동하여 황성으로 향하니라. 선시에 상이 정수경의 소식을 몰라 근심하시더니 첩서옴을 보시고 불승 대희하시더니 뒤좇차 원수에 맞아 손을 잡고 왈, 짐이 경을 전지(戰地)에 보내고 염려함이 간절하더니 이제 경이 도적을 파하고 개가(凱歌)로 돌아오니 그 공노를 다 어찌 갚으리요. 원수 복지왈, 이는 폐하의 홍복이로소이다. 상이 못내 칭찬하시며 환궁하사 익일(翌日) 출전 제장봉작(出戰諸將封爵)하실새 정수경으로 이부상서 겸 총도독 청주후를 봉하시고 장연으로 태학사 겸 기주후를 봉하시고 남은 장수는 차례로 봉작하시니 정장양인(鄭張兩人)이 구지 사양하되 상이 종시 불윤하신대 양인이 마지 못하여 사은숙배하고 각각 본부로 돌아갈새 정후(鄭侯)는 유모(乳母)와 시비르 대하여 석사를 생각하고 슬퍼하며 사묘를 모셔 처주로 가고 장후 또한 사묘와 모부인을 모셔 기주로 가니라. 차설 정후 청주에 도임하여 두루 살펴본 후 수성장 불러 왈, 내 이제 북적을 파하였으나 북적은 본대 강한지라 반드시 기병하여 중원(中原)을 범할 것이니 제읍(諸邑)에 병마(兵馬)를 각별 연습하여 불의의 침범을 방비하라 하고 표를 올려 왈, 신이 청주를 살펴본즉 영웅에 용무할 곳이 오니 마땅히 지용(智勇)있는 장수를 얻어 북방 오랑캐로 하여금 기운을 최찬케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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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니 양주자사 진시회와 강서도독 한복과 호위장군 용봉과 한가지로 도적 막기를 원하나이다 한 대 상이 표를 보내서 지휘하사 삼인을 명하여 청주로 보내시니라. 차설 이때는 대업 십구년 초춘이라 철재가로 제후와 문무백관에 조회를 받으실새 제신(諸臣)을 도라보아 왈, 청주후 정수경과 장연으로 더불어 부마(駙馬)를 삼고저 하나니 경등의 뜻이 어떠하뇨? 제신이 일시에 성교(聖敎) 마땅함을 주하거늘 상이 청주후를 인견하여 왈, 지밍 한 공주(公主) 있으니 경으로 부마를 삼노라. 정수경이 들으매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복지주왈, 신의 비천한 몸으로서 어찌 금지옥엽(金枝玉葉)과 짝하리잇고. 만만 불가하오니 성상은 하교를 거두사 신의 마음을 편케 하소서. 상이 소왈, 고사함은 짐의 후은을 저바리니라. 다시 고집지 말라. 또 장연을 불러 짐의 일매 있어 방년(芳年) 십팔이니 경이 비록 취처(娶妻)하였으나 벗함이 족하니 족히 양처(兩妻)를 둘거니 사양치 말라 하신대 장휘 황공사은 이퇴하더라. 인하여 천자 파조하심에 정후(鄭侯) 장후(張侯)로 더불어 예부상서 맹동흔의 집에 이르러 환담하고 각각 부중으로 돌아옴에 정후 부중에 이르니 유모왈, 군후 무삼 불평한 일이 있나이까? 정후 전후사연 이르고 옥누 방방하더니 문득 생각하되 내 표를 올려 본적을 아뢰리라 하고 상표하니 왈, 이부상서 겸 병마총도독 정수경 돈수백배 하옵고 상표하옵나니 신의 나이 십일세에 아비 절강 적소에서 죽사오니 혈혈여자 의탁할 곳이 없어 외람한 뜻을 내여 천지를 속이고 음양을 변체(變體)하여 입신양명하옴은 원수(怨讐) 진량을 베여 원혼(冤魂)을 위로할까 함이러니 천만 이외에 초방지친(椒房之親)을 유이하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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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은익(隱匿)지 못하와 진정으로 아뢰나니 신의 기군한 죄를 밝히시고 아비생시 장연과 정혼납방하였더니 신의 본적을 감추었으매 장연이 이미 원과 취처하였는지라 신첩은 이제부터 공규(空閨)로 늙기를 원하옵나니 복원 성상은 살피소서 하였더라. 상이 남필에 대경하시고 만좌(滿座) 뉘 아니 놀라리 없더라. 상이 장연을 명초하사 정수경의 표를 뵈이사 왈, 경이 이런 일 정수경과 언약이 있었나뇨? 대왈, 아비 생시에 정흠과 정혼납방하였압더니 정수경더러 묻자온즉 제 누이 있다가 죽었다 하옵기로 신은 그리아옵고 수경이 음양변체함을 몰랐나이다. 상이 서안을 치며 왈, 진실로 이러하였는고? 고금에 희안하도다 하시고 인하여 표에 비답하사왈, 경에 표를 봄에 능히 비답할 말을 생각지 못하리로다. 규중(閨中)의 여자로 의사를 내여 원수를 갚고져 하며 만대전장에 대공을 세우고 도아오니 짐이 그 재주를 사랑하여 부마로 삼고져 하였더니 오늘날 본적을 탈로함이 도리여 국가의 대불행(大不幸)이로다. 경등의 혼사는 내 주장하고 모든 직임(職任)은 환규하니 청주후는 식읍을 삼아두나니 진실하라 하신대 정수경이 비답을 보고 또 방표하며 구치 사양하되 상이 종시 불윤하시니 정후 마지 못하여 입궐 사은하니라. 차설 상이 예부에 하교하사 위의를 준비하라 하시고 또 장후더러 이르시되 빨리 기주로 돌아가 혼례를 이루라 하시니 장후 천은을 감축하고 기주로 가 태부인을 뵈옵고 정후의 전후 사실과 천자의 연중설화를 고하고 혼구를 차리니라. 이때 상이 태감을 청주에 보내사 매사를 간금하라 하시다.이러구러 길일(吉日)이 다다름에 정후 남의(男衣)를 해탈(解脫)하고 여복(女服)을 개착(改着)할새 거울을 대하여 아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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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림에 전일 원융대장이 변하여 요조숙녀 되었더라. 이날 장후 또 한 위의를 차려 청주로 나아가니 그 위의 비할 때 없더라. 태감이 주장하여 장후를 맞어막차에 이르니 허다 절차 전고에 희한한 배라. 이윽고 태감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장후를 인도하여 배석에 나아가 옥상에 홍안을 전하고 내아로 드러가니 홍상한 시녀 신부를 옹위하여 아미석에 이름에 찬란한 복색(服色)과 단정한 용모(容貌)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황하고 양인이 교배를 맞고 외당에 나와 빈객(賓客)을 접대할새 맹동헌이 장후를 대하여 소왈, 군후 전일 원각누에 이세되여 정후에게 보챔을 보았더니 금일의 정후 깊이 드러 군후 안해될 줄 아렀으리요 하며 종일 즐기다가 파연곡을 부를새 빈객이 다 헤여지고 장후 내당에 드러가 석반(夕飯)을 파한후 시비 홍상을 잡어 정후를 인도하여 드러오니 장후 바라본 즉 신부의 화용옥태 전일 남장으로 보든 바와 판이하더라. 이의 촉을 물이고 옥수(玉手)를 이끄러 금침에 나아가니 그 무르녹은 정이 여산여해 하더라. 차설 장후 정후를 권권하여 기주로 돌아올새 정후 수성장으로 성대를 수호하라 하고 위의 갖추어 기주에 이르러 구고(舅姑)께 뵈는 예를 행하며 태부인이 못내 칭찬 볼이하더라. 이러구러 여러날이 되어 장후 사명을 쫓아 황성에 이르러 예궐하니 상하 온 재상이 인견하사 왈, 경이 정수경을 제어하여 도리어 중군을 삼었는지라. 짐이 경등에 원을 이루워 주었으니 경도 짐의 원을 쫓을지라. 수경은 여자라 공주로 경의 배우를 정함이 마땅하도다 하시고 즉일에 흠천관으로 택일하시니 금월(今月)이 십삼일이라. 상이 장후에게 칙지(勅旨)를 내리오사 길예를 하라 하시고 예부상서 맹동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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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초하사 경으로 이미 부마를 정하노라 하신데 맹공이 황공하여 감이 사양치 못하고 사은이퇴하니라. 이때 길일이 다다름에 장후 길복을 갖추어 태감으로 더부러 여러 날 만에 황성에 이르러 입궐숙사(入闕肅謝)하고 공주로 행예한 후, 천자께 사은하고 초방에 들어가니 공주에 천염백태 사람을 현혹케 하는지라. 장후 심중에 만회하며 삼일을 지난 후, 장후 공주를 거나려 기주로 나려올세 홍상 시녀는 쌍쌍히 버려서고 이원풍악은 늉늉하여 그 속에 사뭇는지라. 기주에 이르러 공주 태부인께 납폐행례하고 장공 사묘에 배알한 후, 일모함에 장후 정후 침실에 나아가니 정후 맞아 좌정하며 함수왈, 군후 공주를 맞아 초방 부귀를 누리시니 자미 어떠하시나이까? 서로 담헐 즈음 원부인이 공주로 더부러 이르거늘 정후 이러 맞아 좌정하며 정후 소왈, 공주 궁중에 존중하심을 누지에 욕림하시니 자못 불안하도소이다. 공주 소왈, 첩은 졸헌 사람이라. 황명으로 이의 이르렀으며 일신고락(一身苦樂)은 군자와 원비부인께 달렸으니 어찌 편지 아니하리오. 첩이 궁중에 있을 때 정후의 재덕을 사모(思慕)하더니 금일 한가지로 군자를 섬길 줄 어찌 뜻하였으리오. 정후 또한 손사(遜辭)하더라. 이렇듯 담화하다가 야심후 삼부인(三婦人)이 각각 헤어지니라. 차설 이때는 삼춘가절(三春佳節)이라 정후 시비를 다리고 후원에 드러가 구경하더니 부용각에 이르니 장후의 총희 영춘이 부용각 연못가에 앉아 발을 못에 담구고 무릎 위에 단구를 얹어 곡조를 희롱(戱弄)하며 정후를 보고 요동(搖動)치 않는지라. 정후 대로하여 꾸짖어 왈, 공후장상이라도 감히 만만치 못하려든 너같은 천비 어찌 나를 보고 요동치 아니하는다 하고 즉시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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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환관을 벗고 융복(戎服)을 갖춘 후에 진시회를 불러 영춘을 잡아 오라 하여 대하에 꿇히고 정후 꾸짖어 왈, 네 군후에 총은을 믿고 방자(放恣) 무지하여 주모를 만모(慢侮)하니 그 죄가 가히 머리를 베어 타인(他人)을 징계(懲戒)할 것이로되 주군의 낯을 보아 약간 경책(警責) 하노라 하고 결곤 이십도 하여 내치고 침실로 돌아오니 이때 태부인이 정후의 거오(倨傲)함을 미안이 하든 차에 이를 보고 대로하여 장후를 불러 왈, 영춘이 비록 유죄(有罪)하나 나의 신임(信任)하는 비자(婢子)여늘 정후 내게 품지 아니하고 임의로 치죄하니 어찌 제가 하는 법되라 하리오. 장후 돈수사죄하고 외당에 나와 정후의 시비를 잡아다가 수죄하여 정후의 죄로 맞아라 하고 결장하여 내치니 정후 가장 불쾌히 여기더라. 차설 맹동헌이 어매공주와 성친하고 장후의 부중에 이르더니 장후 맞아 주찬(酒饌)을 나와 대덥하며 답화하더니 야심후(夜深後) 장후 내당(內堂)에 드러가니 삼부인이 정후 침소에 모여 바둑을 희롱하며 서로 술을 가져다가 권하며 담화하거늘 장후 즉시 외당(外堂)에 나오니라. 이때 정후 대취하여 공주와 원부인을 이끄러 양춘각에 이르러 술을 깨고져 하더니 이때 영춘이 이미 누에 올라앉아 경치를 구경하며 조금도 요동치 않거늘 정후 이를 보고 불승분노하여 도리어 침실로 돌아와 융복을 갖춘후 외현에 나와 진시회를 명하여 영춘을 잡아오라 하니 진시회 군사로 하여금 영춘을 잡아 꿇히는지라. 정후 대질왈, 향자에 너를 죽일 것이로대 내 십분 용서하였거늘 네 종시 조금도 기동이 없으니 어찌 통한치 아니리오. 이제 네 머리를 베여 간악(奸惡) 고완한 비자 등을 징계하리라 하고 무사를 명하여 호령하여 영춘을 베이라 하니 이윽고 영춘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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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級)을 올리거늘 정후 좌우로 하여금 궁중에 참시하니 궁중 상하 크게 놀라 태부인케 고하니 태부인이 대경하여 즉시 장후를 불러 대책왈, 네 벼슬이 공후로 있어 한 여자를 제어치 못하고 어찌 세상에 행신하리오. 자부되어 나의 신임하는 시비를 결강함도 가치 않거든 하물며 참수지경에 이르니 이는 불감문어차인이라 하거늘 장후 면관돈수(免冠頓首)하고 물러 이에 정후의 신임 시비를 잡아내어 무수 곤책하고 죽이고져 하거늘 공주와 원부인이 힘써 간하여 끝이니라. 이후로부터 장후 정후를 미안이 여겨 외대함이 많은지라. 정후 조금도 지관함이 없더라. 하루는 정후 진시회를 불러 분부하되 내 이제 청주로 가려하나니 군마를 대령하라 하고 내당에 들어가 태부인께 하직을 고하니 태부인 발연왈 어찌 예고없이 가려 하나뇨? 정후대왈, 봉읍이 중대하옵고 군마 급하였기로 돌아가려 하나이다 하고 공주와 부인을 이별하고 외당에 나와 위의를 재촉하여 청주에 돌아와 좌정하고 전후하여 삼군을 호상하여 무예를 수습하여 불의지변을 방비하더라. 차설 철통골이 겨우 명을 보전하여 호왕을 보고 패한 연유를 말한대 호왕이 대성통곡(大聲痛哭)하며 원수 갚기를 한하여 문무를 모아 의논할세 문득 한 장수 출반주왈, 마웅은 신의 형이라 원컨대 당당이 형의 원수를 갚고 태종의 머리를 대왕 휘아에 드리리다 하거늘 모두 보니 거기장군 마원이라 자용이 겸전하며 호왕이 쾌히 하여 마원으로 대원수를 삼고 철통골로 선봉을 삼아 정병 오만을 조발하여 출사(出師)할세 수식지내에 하부 삼십여성을 항복받고 양성에 다달았는지라 양성 태수 범규홍이 대경하여 상표고번한대 상이 대경하사 문무를 모우고 의논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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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제신이 주왈, 정수경 아니면 대적할 자 없나이다 상이 왈, 전일에는 수경이 여화남인(女化男人) 줄 모르고 전장에 보냈거니와 이미 여자인줄 알진대 어찌 전장에 보내리오. 제신이 주왈, 차인은 뜻이 하늘에 폐하를 위하여 내린 사람이오니 폐하는 염려 마옵소서. 상이 마지 못하사 사관을 청주에 보내어 정후를 명초하사 왈, 이제 국운이 불행하여 국적이 다시 이러나 여차여차 하였다 하니 사세 급한지라 경은 도적을 파하여 짐의 근심을 덜라 하시고 즉시 정수경으로 정북대원수(征北大元帥)를 하이시고 상방검을 주사 임의 처치하라 하시며 어주(御酒)를 사급(賜給)하시더라. 원수 사은한 후, 청주로 돌아와 각도의 전령하며 군기와 군량을 하북으로 수운하라 하고, 한복으로 그 선봉을 삼고 진시회로 중군을 삼고 용봉으로 좌익장 삼고 관영으로 청주성을 직히고 본부병 이십만과 철기 오만을 거느려 즉일 행군하여 십여 일 만에 하북에 이르고 양성태수 범규홍이 대병을 거느려 원수를 맞아 합병하고 적진을 살피더니 수일이 못하여 제도병마 모도이니 장병이 육십 만이요 정병이 삼십 만이라 원수 적진에 격서(檄書)를 보내고 병욕나와 대진하니라. 차설 적장 마원 승승장구하여 경사로 향하더니 문득 정원수(鄭元帥)의 대군을 만나 한번 바라보며 정신이 황홀하여 제장으로 의논왈, 정수경은 천하 영웅이라 진세(陣勢)를 본즉 과연 경적치 못할지라. 가히 금야(今夜)에 자객(刺客) 엄백수를 보내어 수경의 머리를 베이라 하고 엄백수를 불러 천금을 주며 왈, 네 오늘 밤에 송진에 드러가 정수경의 머리를 베어오면 너를 크게 쓸 것이니 부디 시행하라. 엄백수 흔연이 승낙하고 차야에 비수(匕首)를 끼고 몸을 흔들어 풍운을 타고 송진으로 가니라. 차시 원수 한계를 생각하고 기주후 장연에게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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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하되 군무사에 긴급한 일이 있기로 전령하나니 수일 내로 대령하라. 만일 한을 어기면 군법으로 시행하리라 하고 서인을 대하여 병서를 읽더니 문득 일진광풍(一陣狂風)이 등촉을 끄는지라. 마음에 의심하여 소매 안으로서 한 꽤를 얻으며 선흉후길(先凶後吉)하여 이로 인하여 경동하리라 하였거늘 즉시 군중에 전령하여 금야 장졸은 잠자지 말고 도적을 방비하라 하고 홀로 서안에 의지하였더니 이때 엄백수 칼을 끼고 송진장내에 이르니 등촉이 휘황하고 인적이 고요하거늘 장틈을 열어본즉 정원수 갑주를 갖추고 단검을 쥐고 앉았으며 위풍이 엄숙하여 영기 발원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에 현황한지라. 백수 헤오대 차인은 천신이니 해하려다가는 큰 화를 당하리라 하고 스사로 장하에 나려와 칼을 던지고 땅에 엎드려 사죄하거늘 원수 경문왈, 너는 어떤 사람이완데 이 심야에 진중에 드러와 무단이 청죄하는냐? 백수 고주 왈, 소인은 본대 북방 사람이더니 적장 마원이 천금을 주고 노야의 머리를 구하러왔다가 노야의 기상을 보온즉 백신이 호위하였으며 감히 범접지 못하고 죄를 청하나이다. 원수 청파에 왈, 네 이미 중한 값을 받고 위지(危地)에 이르러왔다가 그저 돌아가면 반드시 네 목숨이 위태할 것이니 너는 내 머리를 베어가지고 돌아가 공을 세워라 하니 백수 더욱 황공하여 사죄왈, 죄인이 이미 본심이 발하였고 노야께서 이같이 용서하시니 은덕이 백골난망(白骨難忘)이로소이다. 원수 좌우를 명하여 주효를 가져다가 관대하고 상자 안으로 금을 내어주며 왈, 이를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생애를 위업하고 불의지사를 행치 말라. 백수 불승감은하여 즉시 하직하고 돌아가니라. 차설 원수의 전령이 기주에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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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장연이 남필에 통해하여 내당에 들어가니 사유를 고한대 태부인이 또한 통한하더라. 장후 생각하되 군령이라 마지 못하니 태부인께 하직하고 하북으로 갈세 군량관을 불러 분부하되 군량은 강하로 운전하여 일한에 멋게 하라 하고 배도하여 나아가더라. 차시 자객 엄백수 호진에 돌아가 마원더러 이르되 송진에 들어가본즉 좌우에 범같은 장수가 무수하옴에 감히 해치지 못하였노라 하니 마원이 왈, 만일 그러할진대 명일 다시 성공하라 하거늘 백수 일계를 생각하고 거짓 응낙한 후, 장뒤에서 쉬더니, 이때 마원이 야심함에 홀로 장중에서 잠이 깊이 들거늘 백수 가만이 들어가 마원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송진에 나아가 원수께 드리니 원수 놀라며 일변 기뻐하며 다시 천금을 주어 보내니라. 익일에 군사 보하되, 기주후 장연이 본부병을 거느려 성하에 결진하였으나 군량은 아직 및지 못하였나이다 하거늘 원수 심중에 대희하나 짐짓 소기고져 하여 군량이 및지지 못함을 책하여 아직 부과하라 하고 마원의 수급을 기에 높이 달아 왈, 우리 장졸이 함부로 나간 이 없이 적장의 머리가 내하에 있으며 제장졸은 자시보라 하니 일것 장졸이 대경실색하여 아무 곡절을 몰라 의아하더라. 각설 적장 철통골이 장중에 이르니 마원이 아연이 누웠는데 머리 간데없고 유혈(流血0이 낭자하였는지라 대경실색하여 급히 자객을 찾으니 이미 자취없으매 일군이 황황망조어늘 철골통이 칼을 들고 외여 왈, 만일 즈례 요란하는 자 있으면 참하리라 하고 마원의 시신을 거두어 염반하고 군마를 세대에 난화 진을 베풀고 이 사연을 본국에 보하여 구병을 청하니라.

차시 정원수 각도병마를 통합하여 사대에 분배하고 제장으로 더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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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논왈, 이제 적진 주방이 없으며 금야에 가히 겁칙 하리라 하고 차야에 원수 한번 북쳐 적진을 파하고 철통골을 사로잡아 본진으로 돌아와 원수 장대에 높이 앉아 철통골을 장하에 꿇이고 대질왈, 여등이 무단이 청조를 법코저 하니 그 죄 만사유경이라. 너의를 신규이전하여 후인을 중계 하리라 하니 철통골 등이 머리를 두라려 항복하거늘 원수 좌우로 맨 것을 끌르고 장대에 좌를 주며 주효(酒肴)를 성비하여 관대하니 호장 등이 은덕을 못내 감사하더라. 원수 호장 등을 본토로 보내니라. 차설 원수 우양을 잡아 삼군을 호제하고 원수 또한 술을 연하여 나와 취응이 도도하며 좌우를 호령하여 장연을 나입하라 하니, 무사 쇠사슬로 장연에 목을 올가 장하에 꿀이매 장후 꿀지 않거늘 원수 대로왈, 이 세 도적이 침노하여 승상이 날로써 도적을 막으라 하시니 내 황명을 받자와 주야용병 하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막중군량을 진시 대령치 아니하였나뇨? 장령을 어기었으니 군법은 사사없나니 그대는 나를 원치 말라 하고 무사를 명하여 내어 베이라 하니 장후 대로 왈, 내 비록 용렬하나 그대의 가부(家夫)라 소소 혐의로써 군법을 빙자하고 가부를 공추하니 어찌 여자의 도리리오? 하거늘 원수 차언(此言)을 듣고 더욱 항복 받고져 하여 짐짓 꾸지져 왈, 그대 사세를 모르는도다. 국가 중임을 맡음에 곤이외는 내 장중에 있을뿐더러 그대 이미 범법하였으니 어찌 부부예의를 생각하여 군법을 착난케 하리오. 그대 나를 초개(草芥)같이 여기는도다. 또한 그대같은 장부는 원치 아니하노라 하고 무사를 재촉하는지라. 장후 이에 다다러는 대답할 말이 없으매 다만 고개를 숙이고 왈, 군량은 육노(陸路)로 수운치 못하여 강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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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함에 순풍을 만나지 못하여 지완함이니 어찌 홀로 내 죄라 하리오 한데 제장이 또한 사세 그러한 줄로 구지 간하거늘 원수 양구에 왈, 두루 낯을 보아 용서하나마 그저 두지 못하리라 하고 무사를 명하여 결곤 십여장에 이르러는 분부하여 출한 후, 즉일 회군하여 황성으로 향발할 세 강서 지경에 이르러 한복다려 왈, 진량의 적소 얼마나 하뇨? 대왈, 수십 리는 되나이다 원수분부하되 철기를 거느려 진량을 결박하여 오라 하니 한복 등이 청령하고 나는 듯이 진량 적소에 가 바로 웨쳐 내실로 드러갈세 진량이 대경하여 연고를 묻거늘 한복이 칼을 들어 시노를 베이고 군사를 호령하여 진량을 결박하여 본진으로 돌아와 원수께 고한대 원수 이에 진량을 잡아드려 장하에 꿇이고 노기대발하여 부친모해하던 죄상을 문초하니 진량이 다만 살거지라 빌거늘 원수 무사를 명하여 빨리 베이라 하니 이윽고 진량의 수급을 드리거늘 원수 상탁(床卓)을 배설하고 부군께 실제한 후, 나라에 첩서를 올리고 장연을 기주로 보내고 대군을 회동하여 경사로 향하여 여러 날 만에 궐하에 이르니 상이 백관을 거느려 원수를 맞아 못내 치사하시고 원수를 좌각노 평북후를 봉하시니 원수 사은하고 복부 병을 거나려 청주로 가니라. 차설 장연이 기주에 이르러 태부인께 뵈옵고 전후 사연을 고하니 태부인이 청파에 통본(痛憤)이 여기니 원부인과 공주 고왈, 정후 벼슬이 각노에 이르렀으니 능히 제어치 못할 것이오 제 또한 대의(大意)를 알아 삼가 화목할 것이니 이제 노치 말으소서. 태부인이 그러이 여기어 사자 시녀를 정하여 서간을 주어 청주로 보내니라. 이 때 정후 전후사를 생각하고 심사 울민하더니 시비 문득 보하되 기주 시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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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하거늘 불러드려 서간을 본즉 태부인의 서찰(書札)이라 심하에 깃거 즉시 회답하여 보내고 익일에 행장차려 갈새 홍군취삼으로 봉관 적의에 명월패 차고 수십 시녀를 거느려 성밖에 나오니 한복이 정후의 거교를 호위하고 기주에 이르러 궁내에 들어가 정후 태부인께 고하고 양부인으로 더부러 에필좌정하여 태부인이 전사(前事)를 조금도 혐의 없으니 정후 또한 태부인께 지성으로 섬기더라. 이후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슬하에 선선지낙이 가득하여 정후는 이자일녀 두었으디 장자로써 후사를 이으니 기주를 승세케하고 차자(次子)로 정씨(鄭氏) 봉사를 받드러 청주를 진정케 하며, 원부인 사자일녀(四男一女)를 두고 공주는 이자일녀(二子一女)를 두었으되 다 부풍모습(父風母習)하여 비범치 아니하더라. 왕태부인이 팔십칠세에 기세하며 장후와 삼부인이 애통(哀痛) 과례하여 예로써 선산(先山)에 합장한 후, 삼상을 지내고 더욱 슬픔을 마지 아니하더라. 이때 태황제 또한 붕하시니 공주와 정장 양인이 슬퍼함에 비할 때 없더라. 이후로 장후 부부 안과 태평하다가 나이 칠십세에 이르러는 양양 물가에 풍경(風景)을 완상할 새 이때는 삼월 망간이라 채신을 타고 선유하더니 한떼 채운이 일더니 이 양인이 구름에 쌓여 백일승천하니라. 원부인과 공주는 해를 연하여 죽으니라. 자손이 창황하여 대대로 벼슬이 끝이지 아니하고 충효열절(忠孝烈節)이 떠나지 아니하며 기특한 사적(事跡)을 기록하여 전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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