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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이해 / 김흥규 : 3.한국문학의 갈래 ≪ 중간 · 혼합적 갈래 ≫

Iumiere 2013. 4. 19. 12:43

한국문학의 이해 / 김흥규 : 3.한국문학의 갈래 ≪ 중간 · 혼합적 갈래 ≫




≪ 중간 · 혼합적 갈래 ≫


경기체가(景幾體歌)

경기체가는 13세기 초에 출현하여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 동안 간헐적으로 창작되고 그 이후에는 쇠퇴했으나 19세기까지 드물게 명맥이 이어진 시가 형태이다. 논자에 따라서는 이를 별곡체라 부르기도 한다. 고려 고종 때 한림제유들이 지은 한림별곡으로부터 민규의 충효가(1860)에 이르기까지 이 양식이 존속한 기간은 무척 길지만, 지어진 작품 수는 극히 적어서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20여 편에 불과하다.

이처럼 창작이 드물었던 것은 경기체가가 매우 까다로운 형식 제약과 특이한 관습을 지녔던 데 기인한다. 형태상의 안정성이 크게 흐트러지지 않은 조선 초기까지의 작품을 토대로 살펴볼 때 경기체가는 구문 구조상의 서술적 연결이 박약한 명사 혹은 한문 단형구의 나열에 압도적으로 의존하며, 한 경()의 중간과 끝에서 이들을 ○○ 긔 엇더잇고혹은 이에 상응하는 감탄형 문장으로 집약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원순문 인노시 공노사륙

이정언 진한림 쌍운주필

충기대책 광균경의 양경시부

試場긔 엇더니잇고

() 금학사의 옥순문생 금학사의 옥순문생

위 날조차 몃부니잇고

 

당한서 장노자 한유문집

이두집 반고집 백악천집

모시상서 주역춘추 주대예기

조쳐 내 외긔 엇더니잇고

() 태평광기 사백여권 태평광기 사백여권

위 역람긔 엇더니잇고

 

진경서 비백서 행서초서

전주서 과두서 우세남서

양수필 서수필 빗기드러

위 딕논긔 엇더니잇고

() 오생유생 양선생의 오생유생 양선생의

위 주필긔 엇더니잇고 -한림별곡1~3

 

하나의 경 안에서 첫 번째의 감탄적 포괄까지의 부분을 전절, 그 이하의 엽에 해당하는 부분을 후절이라 한다. 대체로 정형화된 ……잇고를 제외한 부분의 율격을 보면 전절에서는 3음보격이, 후절에서는 4음보격이 쓰였다. 그러나 16세기에 와서는 명사 혹은 한문 단형구만의 배열 관습이 무너지면서 율격 구조도 크게 흐트러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완강한 형식 제약 속에서 일정한 사물사실들을 나열하고 정형화된 감탄구로써 집약하는 시적 구조는 그 성격이 보통의 서정시와 현저하게 다르다. 서정시가 대체로 특정한 상황 속에서의 체험, 생각, 느낌, 소망을 일련의 유기적 형상으로 드러내는 데 비하여, 경기체가는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 행위, 관념들을 순차적으로 나열하고 종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경기체가는 작품 외적 세계의 사실들을 작품 안에 옮겨 놓아 이루어진 교술 시가의 일종이라는 견해가 유력한 설로서 제시되기도 하였다.

경기체가가 객관적 현실계의 사물, 행위와 관념을 병렬적으로 늘어놓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 긔 엇더니잇고와 같은 구절들을 통해 그것들 모두를 아우르는 정서적 감격에로 나아간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기체가는 단순히 사실 기술적이거나 관념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상당한 정도로 주정적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경기체가는 사실이념의 차원과 주정적 심미화의 차원이 특이한 방식으로 결합된 시가이며, 갈래 분포상의 위치를 말한다면 서정의 영역과 사실적이념적 진술의 영역이 인접하는 중간 지대에 놓인 갈래라고 할 수 있다.

경기체가의 성립을 가능케 했던 창작향수층은 고려 후기의 신흥사대부층 문인들로 알려져 있다. 한림별곡을 지은 제유들과 죽계별곡, 관동별곡을 지은 안축(1287~1348)이 이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주로 한시문을 통하여 문학 생활을 영위하였으나, 그것만으로 충족되지 않는 표현 욕구를 위해 간간이 경기체가를 이용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서 상대별곡, 연형제곡, 오륜가등의 악장류 작품이 건국 초기에 창작되고, 16세기에는 주세붕(1495~1554)도동곡, 엄연곡, 육현가등 성리학의 이념을 담은 작품들과 권호문(1532~1587)독락팔곡처럼 처사적 삶의 지향을 노래한 작품이 나타났다. 한편, 조선 초기에는 몇몇 승려들에 의해 불찬이나 불교의 이치를 노래한 경기체가가 창작되기도 하였다. 기화(1376~1433)미타찬, 안양찬, 미타경찬, 세종 무렵의 승려인 의상의 서방가, 세조 때의 승려인 지은의 기우목동가등이 그것이다.

조선 전기가 지나면서 경기체가는 현저하게 쇠퇴하여 다시는 활력을 얻지 못하고 19세기까지 간신히 명맥을 잇는 데 그쳤다. 이와 같은 침체는 그것의 본질에 내재한 폐쇄성의 당연한 귀결이다.

 



가사(歌辭)

가사는 운문 문학의 일종이면서도 극히 다양한 내용들을 폭넓게 수용하는 점에서 일반적인 서정시와 판이한 갈래이다. 가사라고 불리는 것들 가운데에는 서정성이 강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실제적 사실과 체험을 기술하는 데 치중한 것도 있고, 이념교훈을 널리 펴기 위한 노래가 있는가 하면 허구적인 짜임을 제대로 갖추어 일정한 사건을 이야기해 나아가는 작품도 있다.

가사를 이루는 양식적 요건은 극히 단순하여 4음보 율격의 장편 연속체 시가는 모두 그 범위에 포함될 수 있다. 다만, 일부 민요에서 가사와 비슷한 것들이 발견되고, 잡가의 일부와 입이가사허두가 등도 가사와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학자에 따라서는 뒤의 세 가지를 가창가사라 하고 일반적인 가사를 음영가사라 하여 모두 가사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처리하기도 한다.

4음보격 연속체의 율문이라는 형태적 요건 이외에는 주제소재표현 방식규모구성 등에 관한 특별한 제약이 없기 때문에 가사 작품들의 내용과 성격이 다채로운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로 인해 가사의 갈래 특징과 귀속성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를 놓고 많은 논란이 거듭되었다. 가사는 시가와 문필의 중간적 형태라는 견해(조윤제), 율문으로 된 수필이라는 견해(이능우), 가사를 주관적서정적 작품군과 객관적서사적 작품군으로 나누어 각기 서정 문학과 서사 문학에 따로 귀속시켜야 한다는 견해(장덕순), 가사는 율문으로 된 교술 문학의 일종이라는 견해(조동일)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개별 작품들과 양식의 검증만으로 매듭지어질 수 없는 갈래 이론상의 근본적 쟁점까지 얽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자리에서 장황한 논의를 피하고, 가사 작품들의 다양한 성향에 주목하여 그것을 여러 종류의 경험사고 및 표현 욕구에 대하여 폭넓게 열려 있는 혼합 갈래의 일종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상춘곡, 사미인곡, 속미인곡같은 서정적 작품들이 연행가, 일동장유가등의 체험 기술적 기행 가사와 공존하는가 하면, 노처녀가(삼설기 수록), 거사가같은 서사적 작품과 권선지로가, 천주공경가, 도수사등의 이념적교훈적 작품이 공존하는 갈래를 어떤 하나의 범주 혹은 자질에 귀속시키기보다는 그 개방성을 인정하는 시각에서 파악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방성과 아울러 작품 규모에 있어서도 아무런 제약을 두지 않는 너그러운 확장성은 가사로 하여금 시조와 상보적인 관계를 형성하여 활발하게 창작보급되게끔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같은 양식이 언제 이루어졌는가에 관하여는 고려 말 발생설과 조선 초기 발생설이 양립하여 있다. 전자의 문헌적 근거는 고려 말의 승려 나옹화상 혜근(1320~1376)이 지었다는 서왕가이다. 이를 의문시하는 논자들은 지금까지 수집된 증거로 보아 18세기 간행의 미타참절요(1741)에 수록된 것이 서왕가의 최고본인 만큼 가사가 고려 말에 온전한 모습을 갖추어 발생하였다는 설을 이로써 확증하기에는 미흡하다고 본다. 그러나 정극인(1041~1481)의 만년작인 상춘곡이 그보다 앞서는 가사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고려 말 발생설은 아직 가설로서의 의의가 인정된다. 다만, 14세기에 가사 양식이 성립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널리 성행하게 된 것은 조선조에 들어 와서의 일이므로 가사는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의 시가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가사의 역사적 흐름은 시조와 마찬가지로 17세기 중엽을 경계로 한 조선 전기, 후기와 개화애국계몽기의 세 시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조선 전기의 가사는 주로 양반층에 의해 창작되었다. 송순(1493~1584), 정철(1536~1593), 박인로(1561~1642), 조우인(1561~1625)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한시와 시조를 통해 응축된 서정의 표현을 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사의 유연한 포용력을 빌어 여러 가지 생활 체험과 흥취 및 신념을 보다 자유로이 노래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두드러진 흐름을 이룬 것이 이른바 강호시가의 범주에 드는 작품들로서, 혼탁한 세속의 갈등으로부터 물러나 자연을 벗삼고 심성을 닦으며 살아가는 유자의 모습이 다양한 개인적 변형을 통해 표출되었다. 이 부류에 속하는 가사들은 작자의 체험적 생활상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단순히 사실만을 기술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조화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물아의 합일을 추구하는 드높은 서정적 정조를 띤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조선 전기는 뒤의 시대에 비하여 가사의 서정성이 보다 짙었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인심이  야 보도록 새롭거

세사구롬이라 머흐도 머흘시고

엇그제 비술이 어도록 니건

잡거니 밀거니 슬장 거후로니

친 시름 져그나

거문고 시언저 풍입송 이아고야

손인동 주인인동 다 니저 려셰라 -성산별곡정철

조선 후기의 가사는 작자층이 다양화하면서 작품 계열 또한 여러 방향으로 분화되었다.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의 확대, 여성 및 평민 작자층의 성장, 주제와 표현 방식의 다변화 등을 그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한 현상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추세와 더불어 사대부층의 가사도 체험적 구체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모하여, 일동장유가(김인겸, 1707~?), 연행가(홍순학, 1842~?) 등의 기행 가사와 만언사(안조환, 18세기 말), 북천가(김진형, 1801~1865) 같은 유배가사, 그리고 한양가(1844, 한산거사) 같은 풍물 가사 등이 좀 더 활기를 띤 반면, 고아(高雅)한 전원적 삶을 노래하는 서정적 기풍은 상대적으로 생기를 잃고 퇴조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전기 사대부 가사의 바탕을 이루던 관조적 세계관이 서서히 붕괴된 데 따른 결과로 해석된다.

주로 사대부층 부녀들에 의해 창작향유된 가사들은 규방가사라고 불리는데, 영남 지방에서 가장 성행하였으나 다른 지역에서도 작품들이 수집되고 있다. 규방가사의 내용은 여성 생활에 관한 윤리 규범생활 범절의 가르침에서부터 개인과 가정의 특기할 만한 체험소회의 기록 그리고 화전가류의 서정성 짙은 노래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이 넓었다. 일단 창작된 규방가사는 친족들 사이에서 읽히고 전사되었으며, 시집 갈 때 자기 집안의 가사를 여러 두루마리씩 간직하여 가져가는 일도 흔했다고 한다.

평민층의 가사는 내용이 좀 더 다양한데, 대체로 세 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째 계열은 당대 사회의 모순과 학정으로 인한 민중들의 고통을 노래한 작품들로서, 갑민가(18세기 말), 정읍군 민란시 여항청요(1836년경), 거창가등을 꼽을 수 있다.

우부가, 용부가는 둘째 계열에 드는 작품들로서, 추하고 탐욕스런 인물을 등장시켜 신랄한 풍자를 가하면서 당시의 변환기적 세태를 재미있게 희화화했다.

 

저 건너 원은 졔 아비의 덕분으로 돈 쳔이나 가졋드니

슐 한잔 밥 한슐을 친구 얏든가

쥬져넘게 아쳬로 음양슐슈 탐혼

당대발복 구산기 피란곳 져가며

올젹 갈젹 노상에 쳐식을 훗허녹코

공납범용 허허니 일가집에 부업고

 물 경영허고 경향 업시 다니며

상가의 쳥질허다 봉변허고 물너셔고 -우부가

 

평민가사의 셋째 계열은 남녀 간의 애정을 중심으로 하여 욕구의 좌절지연성취 등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다. 노처녀가, 청춘과부전, 거사가등이 그것이다. 셋째 계열 작품들은 상사별곡, 단장가, 양신화답가등과 함께 애정가사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처럼 소재적 공통성에 따라 설정하는 애정가사의 범주에는 평민가사만이 아니라 규방가사의 영역에 드는 작품들도 일부 포함된다.

한편 불교가사를 통해 조선 전기 이래로 오랜 동안 종교적 감화의 수단으로 요긴하게 쓰여 온 종교가사 또한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 작품량이 더욱 늘어나고 다양해졌다. 승려와 일반 신도들에 의해 지어진 각종 불교가사는 물론, 18세기 말엽의 천주공경가(이벽), 십계명가(정약전)를 비롯한 천주가사, 19세기 중엽의 용담유사(최제우, 1824~1864) 등이 그것이다. 이들 종교가사들은 평이한 언어로써 종교적 가르침과 신념을 표현하여 신자들 사이에 광범하게 구송전파됨으로써 해당 종교의 민중적 기반을 확대하는 데 더 크게 기여하였다.

개화애국계몽기의 가사는 이념적사회적 격동기의 요구로 인해 위의 다양성이 후퇴하고 형태상의 커다란 변화와 함께 교술적 속성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흔히 개화기 가사 혹은 개화가사라 불리는 이들 작품은 쉽게 가창 또는 음영할 수 있도록 분량이 축소되고 분연 형식을 도입하였으며 반복구후렴구를 많이 사용한 점이 형태상의 특징이다.




가전(假傳)

가전은 고려 중기 이후 일부 문인들에 의해 이따금씩 창작된 특수한 한 갈래로서, 가전체 혹은 의인전기체라고도 불린다. 이 부류의 작품들은 어떤 사물을 역사적 인물처럼 의인화시켜서 그 가계와 생애 및 개인적 성품, 공과를 기록하는 전기의 형식을 빌었기 때문에 실전에 상대되는 가전 또는 의인전기체라고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동물 우화는 여러 동물 간의 사건이 주내용을 이루는 데 비해, 가전은 한 사물의 내력, 속성, 가치에 대한 관심이 주가 된다는 점에서 양식적 지향이 현저히 다르다.

고려 후기에 가전이 발달하게 된 까닭은 그 창작 계층인 사대부들의 사상적 특질 때문이라는 설명이 정설화되어 있다. , 이 시기의 사대부들은 종래의 구귀족들과 달리 세계와 인간 생활을 구성하는 실제적 사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 하였던 바, 이에 따라 사물과 관념을 긴밀하게 통합하여 파악하는 양식인 가전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 사물과 경험을 중시하되 그것들을 철저한 이념적 해석으로써 걸러내려 하는 점에서 가전은 교술적이며, 그것을 사실에 관한 단순한 지식 혹은 이념으로 전달하지 않고 어떤 인물의 구체화된 생애로 서술한다는 점에서 서사적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가전을 서사적 갈래와 교술적 갈래의 사이에 위치하여 두 가지 성격을 특이하게 통합한 중간 갈래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국순의 자는 자후이며 그 조상은 농서 사람이었다. 그의 90대조인 모()는 후직을 도와서 백성들을 먹여 살림에 공이 컸다. ()는 후에 공을 세워 중산후에 봉하여지고 식읍 일만호를 받아 성을 국씨라 하였다.

순은 사람됨이 넓고 깊으며 기개가 만경파수와 같았다. 게다가 맑으면서도 청하지 않았고, 흔들어도 탁하지 않았다. 그는 늘 엽법사를 찾아 이야기로 날을 새웠는데,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거꾸러지는 것이 예사였다. 드디어 이름이 널리 알려져 국처사라고 불리었다. 공경, 대부, 신선, 방사(方士)로부터 이적(夷狄)과 외국인들까지 그 향기로운 이름을 마시는 자는 모두 이를 부러워하여 기리었다. 어느 때이건 큰 모임에 순이 참석하지 않으면 모두가 쓸쓸해 할 만큼 그는 만인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태위(太尉) 산도(山濤)는 사람 보는 눈이 있어 말하기를 천하 창생을 그르치는 자는 이 사람밖에 없다 하여 청주종사로 물리치고 말았다. 뒤에 다시 평원 독우가 된 순이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자, 상을 잘 보는 이가 있어 말하기를, “그대는 붉은 기운이 얼굴에 있어서 반드시 귀한 자리에 오를 터이니 마땅히 좋은 값을 기다리라.”라고 하였다. 순은 진 후주 때에 크게 쓰이었으나, 나라를 어지럽혔다 하여 내침을 당하고 폭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족제(族弟) 청이 그 뒤를 이어 다시 자손이 번창하였다.

-국순전임춘

 

실재하는 사물의 성질, 효능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주제와 방법 양면을 지배하는 점에서 가전은 교술적인 갈래에 근접한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에도 불구하고 가전은 의인화된 전기가 지니는 서사적 형상력에 힘입어 단순한 사실 기술이나 관념 전달 이상의 형상력을 발휘한다.

돈을 의인화한 공방전(임춘)이나 거북을 의인화한 청강사자현부전(이규보), 대를 의인화한 죽부인전(이곡), 종이를 의인화한 저생전(이철), 지팡이를 의인화한 정시자전(식영암) 등에서도 동일하다.

조선조에 와서는 가전의 창작이 쇠퇴한 대신 의인화된 서술의 방법을 본기체 형식에 확대 적용한 작품들이 띄엄띄엄 출현하였다. 임제(1549~1587)수성지화사(일설에는 남성중 혹은 노경의 작품이라 함), 김우옹(1540~1603)천군전, 정태제(1612~1669) 창작설이 있는 천군연의, 정기화(1786~1840)천군본기등이 그것이다. 이들 작품은, 식물 세계를 의인화한 화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람의 마음을 의인화한 것으로서, 이로 인해 심성가전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이처럼 긴 생명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전과 그 확대형인 수성지계열의 양식은 소수의 사대부 문인들 사이에서만 창작향유되는 국한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들 작품이 극히 난삽한 전고와 소수 문인들끼리의 현학적 기상에 많이 의존하였을 뿐 아니라, 현실 체험과 유리된 가공성과 고답적 관념을 추구하는 데 골몰하였기 때문이다.

 



몽유록(夢遊錄)

몽유록은 몽유 구조를 기본 골격으로 하는 양식으로, 15세기 중엽부터 출현하여 조선조 전 기간에 걸쳐 사대부 문인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창작되었다. 몽유 구조란 얼핏 보기에 구운몽등 환몽소설의 기본 구조와 비슷하게 여겨질 수 있으나 그 속성은 크게 다르다. 환몽 구조에서는 주인공이 꿈을 통해 새로운 인물로 태어나 파란많은 일대기를 거친 뒤 죽음으로써 다시 원래의 자아로 되돌아오는 이야기가 3인칭의 전지적 관찰자에 의해 서술된다. 반면에 몽유록에서는 서술자가 꿈꾸기 이전의 자신의 동일성과 의식을 유지한 채 꿈 속의 세계로 나아가 일련의 일들을 겪은 뒤 본래의 현실로 귀환하여 그 체험 내용을 스스로 서술한다. 아울러, 환몽소설의 꿈 부분은 그 전체가 유기적인 사건의 연쇄로 엮어진 한 인물의 일생담이지만, 몽유록의 몽유 부분은 서술자가 다수의 인물들을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그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견문한 내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중요한 차이이다.

예컨대, 심의(1475~?)대관재몽유록에서 서술자 - 작자는 꿈의 세계를 빌어 최치원이 천자의 자리에 앉고, 을지문덕, 이규보, 정도전, 김종직 등의 역사적 인물들이 각기의 재능에 따라 관직을 차지하는 이상적 봉건 관료 사회를 구성하고, 그 자신도 이곳에서 뜻을 이루게 된다는 이념적 환상을 그렸다. 임제(1549~1587)원생몽유록은 비탄에 찬 선비인 원자허가 꿈 속에서 단종, 사육신 등에 견주어지는 인물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노래를 지어 부르며 비분강개하다가 깨었다는 내용으로서, 세조의 왕위 찬탈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비판 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금화사몽유록, 사수몽유록, 달천몽유록, 피생몽유록, 강도몽유록등의 작품들 역시 몽유자(서술자)가 유명무명의 역사적 인물들과 나누는 이야기가 작품의 주요 내용이 된다는 점은 대체로 같다.

이러한 구조 원리와 내용상의 특징으로 인해 몽유록의 갈래 속성에 관하여는 교술 문학설과 서사 문학설이 대립하여 있다. , 몽유록이 몽유설화나 소설과 달리 작품 밖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념주장평가를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는 점을 중시할 경우 교술 갈래의 일종으로 파악되고, 몽유담을 객관적 사실과 작가의 주관적 의지 사이의 대립 갈등에서 나온 허구적 형상으로 이해하는 데 치중할 경우 그 서사적 속성이 좀 더 중시되는 것이다.

몽유록의 기원은 금오신화중의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및 이와 비슷한 전기적 몽유담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생 단계로부터 본격적인 몽유록이 형성발전된 데에는 사대부적 이상과 현실 사이의 모순이 심화된 조선조 중엽 이래의 상황이 주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모순된 현실에 처하여 자신의 이념 가치를 굳게 지키고자 하면서도 그것을 실현할 만한 현실적 방도를 찾지 못하였던 사대부 문인들은 몽유 세계라는 가상적 공간을 통해 역사상의 인물들과 만나 현실에의 울분을 토로하고 소망스러운 질서를 구성해 보는 특이한 환상의 양식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몽유록은 현실 비판의 우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인 작품들(원생몽유록, 달천몽유록, 피생몽유록)과 낙관적 이념의 허구화된 충족에 치중한 작품들(대관재몽유록, 사수몽유록, 금화사몽유록)의 두 계열로 나뉘는데, 전자가 비장하고 준열한 윤리 의식을 띠는 데 비하여 후자는 환상을 통해 일시적 만족을 추구하는 희필(戱筆)의 성격이 짙다.

어느 쪽의 경우든 몽유록은 현실과 이념 가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바탕으로 존립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중세적 질서 자체가 무너지던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 의의는 쇠퇴하고, 천궁몽유록, 몽결초한송(제마무전) 같은 소설적 변이형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 작품에 채용된 몽유록적 요소는 본래의 성격에서 이탈하여 소설적 흥미를 장식하는 정도에 그쳤다. 개화기에 와서는 꿈하늘(신채호), 몽견제갈량(유원표) 같은 작품이 이념적 표출의 양식으로서 몽유록의 유산을 빌었으며, 현대 작가로는 최인훈이 관념 소설적 표현에 몽유록의 수법을 활용한 예가 있다.

 



야담(野談)

야담은 주로 한문으로 기록된, 비교적 짤막한 길이의 잡다한 이야기들의 총칭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면 야담의 성격과 양식적 원리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런 정도의 느슨한 윤곽을 그어 말할 수밖에 없을 만큼 다양한 내용, 성격의 이야기들이 뒤섞이어 매우 방만한 군집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곧 야담의 특성이다.

야담의 한 끝에는 실재했던 삶에 관한 사실적 진술이, 다른 한쪽 끝에는 한 시대의 사회상을 집약하여 생생하게 드러내는 허구적 형상으로서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포괄하는 영역이 넓게 펼쳐져 있기 때문에 야담은 작품에 따라 순전한 사실담이기도 하고 잘 짜여진 허구적 서사이기도 하며 혹은 그 사이의 다양한 층위에서 운동 중인 중간적 산문 문학이기도 하다. 그런 뜻에서 야담을 그 포괄 영역이 서사와 교술 사이에 완만하게 펼쳐져 있는 혼합 갈래라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야담의 기원이나 발생을 딱 잘라 말하기란 특히 어렵다. 대체로 짐작하건대 고려 후기의 역옹패설같은 시화잡록류 문학에서 일화기담의 요소들이 발달하여 서거정의 태평한화골계전같은 일화집이 이루어지면서 야담의 초기 형태가 성립하고, 유몽인(1559~1623)어우야담에 이르러 본격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어우야담이 야담의 발달 과정에 특히 주목되는 이유는 그것이 강희맹(1424~1483)촌담해이나 송세림(1479~?)어안순처럼 남녀 관계에 관한 소담류의 범위에 국한되지 않고 야사, 일화와 구전 설화를 폭넓게 수용하여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엮어냈다는 점에 있다.

조선 후기에 와서 야담은 급속도로 발달하여 다양한 작품들이 이루어지고, 많은 야담집이 출현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계서야담, 청구야담, 동야휘집3대 야담집이라 불릴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들 야담의 기록개작편집을 담당한 인물들은 주로 사대부층에서 나왔으며, 일부 야담집은 중인층의 손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담당 계층의 이러한 국한성에도 불구하고 야담은 정통 한문 문학과 달리 당대 사회의 갖가지 모순과 갈등 및 여러 계층에 걸친 인물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그럴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야담의 상당 부분이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들에 바탕한 것이라는 점과 그 작자층이 당시의 변환기적 사회상을 체험하면서 중세적 질서에 대해 비판 혹은 회의의 시각을 지녔다는 점이 주목된다.

야담에 자주 등장하는 문제들을 간추려 보면, 부의 축적, 사람의 본능적 욕구, 세속적 이해 관계, 낡은 신분 질서의 붕괴, 주인-노비 사이의 갈등, 도적과 사기꾼들, 시정인들의 생활상, 특이한 삶을 살아간 기인일사들, 세태에 대한 풍자와 해학 등을 꼽을 수 있다.

전반적으로 사대부적(혹은 중인적)인 인식의 제약이 충분히 극복되어 있지는 못하다는 사실이다. 야담들의 말미에 덧붙여져 있는 기록자의 평결이 유가적 윤리 의식에 매인 예가 많다는 점은 놓아 두고라도, 민간의 기문일사와 설화적 전승을 개작하는 과정에서 사대부적 지향이 내용 자체의 성격을 변질시킨 사례도 적지는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