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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이해 / 김흥규 : 3.한국문학의 갈래 ≪ 서정적 갈래 ≫

Iumiere 2013. 4. 19. 12:35

한국문학의 이해 / 김흥규 : 3.한국문학의 갈래 ≪ 서정적 갈래 ≫ 





고대가요(古代歌謠)

이 시기의 가요들은 수렵채취농경에 관련된 주술원망이나 종교적 기능을 지닌 것이 선행하였을 터이나, 천지자연과 초월적 존재에 대한 예찬환호감탄청원기구(祈求)고백 등의 제의적 서정과 더불어 사람살이의 여러 소망과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서정가요 또한 존재하였던 것 같다.

이 시기의 시가 중 한역되어 전하는 구지가는 분명한 주가로서 제의적 행위의 일부분이지만, 공후인은 작품의 내용과 부대 설화를 액면대로 해석할 때 절실한 비탄을 담은 서정시로 볼 수 있다. 고구려의 둘째 임금인 유리왕이 노래했다는 황조가는 간결하면서도 적절한 표현력을 갖춘 서정시이다.

 

가벼이 나니는 꾀꼬리여

암숫놈이 어우러져 정답구나

내 몸의 외로움 생각노니

그 뉘와 더불어 돌아갈거나 -유리왕황조가

 

고대가요는 모두 사언 사구의 한시형으로 번역되어 전해진다. 성립 시기와 출전을 달리하는 작품들이 이처럼 동일한 형태를 가진다는 것은 한역자가 중국 고대가요인 시경소재 작품들의 형태를 참조한 때문일 터이나, 이와 아울러 당시의 우리 고대가요가 지녔던 정형이 4구로써 한 작품 혹은 가절을 만들었던 것을 반영하는 사실이 아닌가도 생각해 봄직하다.

 

향가(鄕歌)

향가는 이처럼 구비 문학적 성격을 띤 작품에서부터 개인작의 세련된 창작 시가에까지 걸쳐 있을 뿐 아니라, 형태와 내용 또한 단일하지 않다. 따라서 그것을 통일적 관습 및 원리를 지닌 단일한 갈래라고는 볼 수 없다. 향가라는 이름의 당대적 의미는 당시(唐詩), 범패에 대응되는 자국어 시가의 총칭으로 보아야 한다.

향가가 하나의 단일한 갈래가 아니라 여러 층위의 작품군 및 시가 양식의 범칭이라는 점은 무엇보다도 그 형태상의 다양성에서 나타난다. 현재 남아 있는 향가는 삼국유사에 실린 14수와 균여전소재의 보현십원가11수를 합한 25수인바(예종의 도이장가를 넣으면 26), 이들 중 서동요」「풍요」「헌화가」「산화공덕가4구체이며, 모죽지랑가」「처용가8구체, 그리고 혜성가」「찬기파랑가」「제망매가」「보현십원가등 나머지 19수는 10구체이다. 이와 같은 형태적 다양성은 구수의 많고 적음에 그치지 않고 시상의 전개 구조에 있어서의 차이까지를 동반하는 것이다. 특히 10구체 향가는 작품 전체가 세 토막(4/4/2)으로 나뉘면서 마지막 2(낙구, 후구, 격구)의 머리 부분에 정서적 고양을 집약하는 감탄사가 오도록 양식화되어 있어서 4구체, 8구체와는 전혀 다른 시적 구도를 보인다. 현존 향가의 세 가지 형태는 그들 사이에 발생론적인 연관이 있으면서도 각기의 양식적 개별성과 의의를 지녔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내용상으로도 향가 작품들의 성격은 단일하지 않다. 10구체 향가는 모두 개인작의 서정시이지만 풍요는 분명히 민요이며, 처용가는 무가로 이해되고, 헌화가는 민요와 무가의 사이에서 해석의 가능성이 거론된바 있다.

현존 작품들을 살펴보면 향가는 적어도 두 부류, 즉 민요이거나 민요적 속성이 짙은 4구체류와, 작가가 뚜렷하며 세련된 개인적 서정을 담은 10구체류로 나누어 문학 담당층을 논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전자는 하층민까지를 포함한 광범한 분포 영역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후자는 거의가 화랑승려 등 상층의 신분에 속하는 이들에 의해 창작되었다.

10구체 향가는 전편이 세 토막으로 구성되어, 앞의 네 구에서 시상을 일으키고 다음 네 구에서 이를 심화 혹은 전이시킨 뒤 아야(阿也)’[타심(打心), 성상인(城上人)]라는 감탄사에 이어지는 낙구에서 이를 서정적으로 완결하는 견고한 짜임을 지니고 있다.

 

생사 길흔

이에 이샤며 머믓그리고,

다 말

몯다 니르고 가닛고.

어느  이른 

이에 뎌에 러딜 닙,

 가지라 나고

가논 곧 모론뎌.

아야 미타찰아 맛보올 나

닷가 기드리고다. -월명사제망매가/ 김완진 해독

 

이와 같은 정서적 고양과 해결의 구조는 숭고한 존재의 예찬 혹은 간절한 기원의 표출 등과 같은 주제에 특히 잘 부합하여, 찬기파랑가」「원왕생가」「보현십원가등의 맑고도 깊은 서정과 기원을 담은 명작들이 창작되었다. 여기에 불교적 세계관이 직접간접으로 중요한 작용을 끼쳤다.

 

고려속요(高麗俗謠)

고려의 건국 이후 한문학이 발달하면서 향가가 쇠퇴하자 국문 시가는 다시 구비 전승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때문에 한시를 제외한 이 시기의 시가는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으며, 한글 창제 이후의 몇몇 문헌에 정착된 소량의 자료만이 그 편모를 보여줄 뿐이다. 그러한 작품 가운데서 경기체가를 제외한 국문 시가들을 보통 고려속요라 하며, 학자에 따라서는 이를 고속가장가별곡 등으로 지칭한 예도 있다.

고려속요란 이처럼 현전하는 고려가요 중 경기체가 이외의 국문 시가에 대한 편의적 지칭이기 때문에 그것이 단일한 시가 양식으로서의 공통 원리와 속성을 가진다고 섣불리 가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현전 작품 대부분이 악학궤범(1493), 시용향악보(16세기 초 이전), 악장가사(16세기 중엽?)에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현전 고려가요는 고려시대 시가의 전모를 두루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조 궁중악의 일부분으로 조선조에 전해지고 다시 조선 초기의 구악 정리 과정을 거쳐 문헌에 남겨진 작품들인 것이다.

현전 고려가요는 고려시대 시가의 전모를 두루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조 궁중악의 일부분으로 조선조에 전해지고 다시 조선 초기의 구악 정리 과정을 거쳐 문헌에 남겨진 작품들인 것이다. <정읍사정과정곡10구체 향가의 구조와 비슷한 형식으로 인해 쇠퇴기 향가, 혹은 향가에서 고려속요로의 전이 과정에서 출현한 형태로 이해되기도 한다. 청산별곡, 동동, 서경별곡, 쌍화점, 만전춘등 고려속요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분연체 시가는 작품마다 독특한 후렴구 혹은 구음(口音)을 중간에 삽입하는 것이 특징이다. 율격에 있어서는 고려속요 전반에 3음보격이 우세하게 나타나지만, 이에 부합하지 않는 시행이나 작품들도 더러 보인다.

 

서경이 아즐가

서경이 셔울히 마르는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닷곤아즐가

닷곤쇼셩경 고마른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므론 아즐가

므론 질삼뵈 리시고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괴시란아즐가

괴시란우러곰 좇니노이다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서경별곡

 

작품의 기원 및 성격에 따른 종류

민요

상저가, 사모곡, 가시리등은 궁중 악가의 일부로 전승된 것이라 해도 민요적 기원과 속성을 유지한 점에서 속요라는 이름에 부합한다.

민요로부터 현저하게 개작윤색된 궁중무악 가요

민요의 일부가 악공, 관기 등에 의해 궁중으로 유입되어 그대로 존속하거나 혹은 개편윤색되었기 때문에 고려속요는 궁중 악가라는 전승상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민요적 속성을 많이 지니게 된 것이다.

 

듥긔동 방해나 디히 히얘

게우즌 바비나 지히얘

아바님 어머님고 히야해

남거시든 내 머고리 히야해 히야해 -상저가

 

한편 민요적 기원의 작품들 중 상당수는 궁중 악곡으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많은 개작이 가해져서 본래적 성격을 상실한 것도 있다. 충혜왕 시대 등 고려 후기 왕실의 유락적 풍조 속에서 지어진 후전진작이라든가, 쌍화점, 만전춘등의 부류가 그것이다.

개인창작가요

개인 창작 가요로는 쇠퇴기 향가인 도이장가(예종)와 향가의 잔존형이라 추정되는 정과정곡(정서) 등이 현전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작품들은 고려사악지와 예전(例傳)에 제목, 작자, 창작 동기에 관한 간단한 기록만으로 알려져 있다. 청산별곡은 일반적으로 민요적 기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귀족 혹은 문인층에 속하는 인물의 창작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시조(時調)

시조는 우리 문학의 전통적 양식 가운데서 가장 오랜 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창작가창되고 다수의 작품이 현전하는 갈래이다. 312구로 이루어진 간결한 형식, 절제된 언어, 시상의 흐름을 알맞게 통제하면서도 개별적 변이를 소화해 내는 서정구조, 담백온아한 미의식. 이와 같은 특질이 시조로 하여금 오랜 동안 생명력 있는 시 형식으로 존속하도록 하였다.

시조의 정형적 틀은 네 개의 음보가 결합하여 한 행을 이루고 그것이 세 번 중첩되어 한 수를 이루는, ‘4음보격 3행시의 구조로 일단 규정할 수 있다. 시조 율격의 기본 단위가 되는 소리마디 가운데서 출현 빈도와 음절수의 평균치로 보아 기준이 되는 4음절 음보를 평음보라 하고, 그보다 작은 음보를 소음보, 큰 음보를 과음보라 한다면, 시조의 일반적 율격 형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괄호 안에 표시된 것은 해당 위치에서 적지 않은 출현 빈도를 보이는 허용형).

 

() 평 소()

() 평 소()

소 과 평 소()

 

노래 / 삼긴 사/ 시름도 / 하도할샤 //

닐러 / 다 못닐러 / 불러나 / 푸돗//

진실로 / 플릴 거시면은 / 나도 불러 / 보리라 // - 신흠

 

이와 같은 율격 구조에서 초중장은 () - - () - 의 비교적 규칙적인 흐름을 유지함으로써 각 장의 뒤에 무엇인가가 이어질 것을 예상케 하는 율격적 개방성을 띤다. 반면에 종장은 이 평명한 연속성을 차단하여 호흡을 비대칭적으로 긴장시켰다가 풀어줌으로써 작품을 완결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특히 종장의 전반부가 지닌 소음보-과음보의 불균형한 구조는 여기에 시적 긴장이 모이도록 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후반부는 여기에 이어지는 이완의 흐름을 형성하여 한 수를 마무리하도록 정형화되어 있다. 아울러, 종장의 서두에 흔히 감탄사 또는 감탄적 의미를 내포한 말들이 자주 온다든가, 종결부는 대개 ‘-노라, -로다, -놋다등의 감탄형이나 ‘-하리라, -()등의 의지형명령형을 사용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주체의 정서적 태도를 집약하는 구문의 특성을 지닌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시조가 3장의 간결한 짜임만으로도 구조적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서정적 고양과 완결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형식 원리에 힘입은 바 크다.

이처럼 정형화된 양식이 완성된 시기는 대체로 고려 말경으로 추정되어 왔으나, 그 기원에 대하여는 의견이 일정하지 않다. 10구체 향가의 3분절 구조에서 시조가 비롯하였으리라는 설, 만전춘별사에서 보는바 4음보격 3행시의 형태에서 시조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설, 그리고 고려 후기의 민요(특히, 모 노래와 같은 부류의 민요)로부터 시조가 나왔으리라는 설 등이 그 중 대표적인 것이다.

하지만 시조의 발생 시기는 고려 말엽이라 해도 그것이 본격적으로 융성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위에 지적한 바와 같이 간결담백하게 절제된 시조의 언어와 형식은 사대부층의 미의식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한시만으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감흥과 정취를 이에 담아 단아한 기품으로 노래하였다.

사대부층을 중심으로 발달한 조선 전기의 시조에서는 이현보(1467~1555), 이황(1501~1570), 권호문(1532~1587), 정철(1536~1593), 신흠(1566~1628) 등 뛰어난 작가들이 나왔다. 그 주제의 성향은 유가의 이념규범을 노래한 것과, 혼탁한 세속의 갈등으로부터 벗어나 강호 자연 속에서 심성을 기르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그리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윤선도(1587~1671)어부사시가, 산중신곡등은 이러한 흐름의 대단원인 동시에 시조의 언어적심미적 세련이 도달한 하나의 정점이라고 할 만하다.

이 시기 강호시가의 편모를 살피는 데 다음의 자료들이 약간의 도움이 된다.

강호에 밤이 드니 물결이

낙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

무심 빗만 싯고 뷘 저어 오노라 -월산대군

 

믈가의 외로운 솔 혼자 어이 싁싁

 여라  여라

머흔 구룸 한티 마라 세상을 리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파랑성을 염티 마라 진훤을 막또다

 

어와 져므러간다 연식이 맏당토다

븟텨라 븟텨라

 눈 쁘린 길 블근 곳 흣더딘 흥치며 거러가셔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설월이 서봉의 넘도록 송창을 비겨 잇쟈 - 윤선도, 어부사시사, 810

 

사대부층이 주요 담당층이었던 조선 전기 시조의 흐름은 17세기 후반 이후 평민 가객들의 활동이 커지고 시조창이 널리 보편화되는 등 창작수용에 관여하는 계층의 확산과 중심 이동 현상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전까지 가곡이라는 전아한 고전적 창법으로 불리던 시조가 이 시기에 와서는 좀 더 평이하며 대중적인 친화력을 가진 시조창법으로도 불리게 되고, 김천택김수장 등 중인층 가객에 의해 청구영언(1728), 해동가요(1차 편찬 1755) 등 많은 가집이 엮어지게 된 사실이 그 단적인 징표이다.

이와 같은 흐름에 병행하여 시조의 제재와 주제 또한 크게 다양화되어 사대부 시조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나타났는가 하면, 유명무명의 작자들에 의해 평민적 생활 체험과 감정의식이 새로운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장검을 혀 들고 다시 안자 헤아리니

흉중에 머근 이 한단보되야괴야

두어라 이 한 명이여니 닐러 므슴 하리오 - 김천택

 

백사장 홍료변에 굽니러 먹는 져 노야

닙에 두셋 물고 무어 낫굽니느냐

우리도 구복이 웬슈라 굽니러 먹네 - 작자 미상, 남훈태평가수록

 

사설시조(辭說時調)

사설시조는 본래 평시조보다 긴 사설을 엮어 넘기는 창법의 범칭으로 쓰이다가 이에 속하는 작품들 전반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그 형태를 보면 대개의 경우 종장은 평시조와 비슷한 틀을 유지하되 초중장 혹은 그중 어느 일부가 4음보 율격의 정제된 구조에서 현저하게 이탈하여 장형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논자에 따라서는 이들을 엇시조와 사설시조로, 혹은 중형시조와 장형시조로 구분하려 한 예도 있다. 그러나 엇시조(중형시조)와 사설시조(장형시조)의 형태적 차이를 어떻게 구분한다 하더라도 그들 사이의 국부적 변별성보다는 평시조와는 전체적 대비에서 드러나는 형태 및 내용상의 차이가 뚜렷하고도 중요하다는 점에서 근간에는 이들을 한데 묶어 사설시조(장형시조, 장시조)라 규정하는 관점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와 다른 또 하나의 견해는, 비록 소수의 학자들의 주장이지만 사설시조가 시조의 파격변형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조선 중기 이전부터 존속해온 민간 가요의 영역으로부터 나왔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들은 사설시조라는 이름 대신 만횡청이라는 용어를 제안하였다. 그리고 이 부류의 작품들은 평시조와 달리 하층민들의 가요로부터 전이되어 주로 평민층의 생활 체험과 의식을 표현하는 별도의 시가로서 18세기 초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형성되었을 터인바, 그것이 사설시조라 불린 것은 시조창의 곡조장단을 채용한 음악상의 요인 때문이라고 보았다.

사설시조를 지배하는 원리는 웃음의 미학이라 할 수 있겠는데, 현실의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반어, 중세적 고정관념을 거리낌 없이 추락시키는 풍자, 고달픈 생활에 대한 해학 등이 그 주요 내용을 이룬다. 아울러, 남녀 간의 애정과 기다림 그리고 성()의 문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대개는 직선적인 언어를 통해 강렬하게 다루어진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져 건너 흰 옷 닙은 사 믭고도 양믜왜라

쟈근 돌리 건너 큰 돌리 너머 밥여 간다 여 가고 애고애고 내 서방 삼고라쟈

진실로 내 서방 못될진대 벗의 님이나 되고라쟈

 

부러진 활 것거진 툥 동로구 메고 원니 황제 헌원씨를

상탈야 아닌 전에 인심이 순후고 천하 태평여 일만팔천세 사랏거든

엇더타 습용간과여 후생 인케 연고

 

사설시조가 조선 후기라는 시대의 상황 속에서 종래의 관습화된 미의식과 규범적 세계상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의 모습, 욕망, 갈등을 시의 세계 안에 이끌어들이고 갖가지 추한 것과 비천한 것들까지도 적극적으로 다룸으로써 새로운 문제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서정민요(抒情民謠)

민요는 기능성격에 따라 서정적인 부류와 서사적인 부류를 구분할 수 있으며, 이밖에 일정한 사실기억지식 따위를 노래하는 교술적 민요도 있다.

민요는 기능적 특성에 따라 기능요와 비기능요로 나뉘고, 기능요는 노래를 수반하는 기능의 종류에 따라 노동요, 의식요, 유희요로 구분된다. 이 중에서 서정적인 노래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우선 비기능요를 들 수 있다. 비기능요는 특정한 일과 관련이 없이 흥이 나면 언제 어디서나 부르는 노래이므로 내용 및 형태상의 제약이 별로 없으며, 대개는 음악적으로나 문학적으로 기능요보다 더 다듬어져 있다. 그 주제는 삶의 여러 국면에서 자주 부딪치는 문제들에 대한 소망, 괴로움, 슬픔, 기쁨 등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주제적 특징과 형태상의 상대적 간결성이 비기능요로 하여금 보다 많이 서정적 경향을 띠도록 한다.

기능요 가운데서는 노동요에서 서정 민요가 더 많이 발견되지만, 의식요에도 서정 민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사람의 죽음에 관련된 의식요(상여소리, 달구질 노래)에는 구성지고 슬픈 가락에 실려 불리는 서정민요들이 많이 보인다. 다만, 이들 기능요의 경우에는 모노래, 보리타작 노래, 놋다리밟기 노래등 하나하나의 종류가 일률적으로 서정적이거나 서사적인 속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과 노래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민요는 또한 가창 방식에 따라 선후창, 교환창, 일인창(제창)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1인창 방식의 민요는 단형일 경우 대개 서정적인 부류에 속한다. 선후창과 교환창 민요는 여러 성격의 노래들이 섞여 있어서 작품에 따라 가릴 수밖에 없으나, 서정적 노래든 서사적 노래든 간에 선후창 쪽이 즉흥성과 개인적 창의를 더 많이 허용한다는 점에 유의할 만하다. 선창자와 후창자가 의미 있는 가사를 번갈아 부르는 교환창에 비해 선후창에서는 한 사람의 선창자가 의미 있는 가절을 부르고 후창자는 반복적인 후렴으로 이를 받기 때문에 더 많은 창의성과 변화가 허용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정적 방향의 선후창 민요는 표현의 다양화와 개인성 발휘에 좀 더 큰 여유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어어루 상사디야

뒷동산에 할매꽃은

어어루 상사디야

늙으나 젊으나 꼬부라졌네

어어루 상사디야

뒷동산에 고목나무

어어루 상사디야

내 속캉 같이 또 다 썩었네

어어루 상사디야 -논매기 노래, 경남 거창군

 

방실방실 윗는 님을 못다 보고 해가 지네

걱정 말고 한탄 마소 새는 날에 다시 보세

물 밑에 고기 중에 잉어 고기 지맛일레

나무 끝에 실과 중에 청실배가 지맛일레

 

수건 수건 반포수건 님 떠주는 반포수건

수건 귀가 떨어지면 님의 정도 떨어지네

 

잠 못잘세 잠 못잘세 궁디시레 잠 못잘세

덮어주소 덮어주소 한산 소매로 덮어주소 -모내기 노래, 경북 영양군

 

내용 및 언어적 측면에서 본 서정민요의 특징은 일반 민중들의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경험과 느낌을 진솔한 언어로써 표현한 점에 있다. 때로는 구슬프고 비통하게, 때로는 익살스럽거나 활기차게 자신들의 삶에 직결된 문제들을 노래한다.

 

한시(漢詩)

우리나라에서 한시가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고대가요의 한역이 이루어진 시대까지 소급될 터이나, 활발한 창작은 신라의 육두품 문인처럼 한학에 소양이 깊은 지식 계층이 대두하면서부터 였으리라고 볼 수 있다. 그 뒤 고려를 거쳐 조선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한시는 귀족, 양반층의 필수적 교양인 동시에 자기표현의 서정양식으로서 널리 자리 잡게 되었다. 문인사대부들에게 있어서 한시의 창작은 신분적 위신의 확인 및 계층 내적 교유에 불가결한 수단이었으며, 내면적 차원에서는 우주자연인생의 갖가지 국면에서 느낀 바를 응축된 언어로써 표출하는 문학 양식이 되었다.

양식상의 구분으로 보면 대체로 율시, 절구와 같은 근체시가 고시보다 더 많이 창작되었으나, 성률의 제약이 적은 고시의 창작 비율이 중국 문학의 경우보다는 더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의 주제와 미의식에 있어서는 한문 문학 일반이 지닌 중국적 전례 지향이 작용하여, 도연명, 이백, 두보, 백낙천, 소동파, 황정견, 매요신 등 중국의 이름난 시인들이 숭상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마침내 중국적 성율전범에의 집착으로부터 탈피하여 우리의 역사, 문화와 현실 경험을 좀 더 자각적으로 표현하는 조선시’(정약용), ‘조선풍’(박지원), ‘이언’(이옥)의 지향에로까지 발전한바 있다. 한편 17세기 중엽 이후 중인층의 사회적 성장과 병행하여 시문학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한시가 사대부 이외의 평민층에까지 수용된 점도 여러 모로 흥미로운 사실이다.

 

허두가(虛頭歌)

판소리 창자들은 춘향가, 심청가등의 판소리 한 마당을 소리하기 전에 목청을 풀고 소리판의 분위기를 가다듬기 위해 허두가라는 것을 부른다. 보통 판소리 단가라 일컫는다.

판소리는 무척 넓고 다양한 음역, 발성법과 장단의 변화를 구사하기 때문에 곧바로 본 마당을 창하는 것은 창자에게 무리한 부담이 될 뿐 아니라 청중을 소리판에 자연스럽게 동화시키는 데에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허두가의 분위기가 대체로 유장할 뿐 아니라 음악적 특징에서도 중모리 장단에 중간 속도의 순탄한 선율로 되어 있음은 그런 점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허두가는 대략 4050편 정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가운데서 만고강산, 진국명산, 죽장망혜, 불수빈, 강상풍월, 편시춘20여 종이 오늘날까지 불린다. 이들 작품의 내용은 순수하게 서정적인 것도 있고, 고사를 잡박하게 열거하여 읊조리면서 인생을 담론하는 것도 있으며, 화려한 장식적 언어로 천하의 기문장관을 노래한 것도 있다. 대개의 허두가는 서정적 성격이 짙다.

언어와 수사에 있어서는 거의 모든 허두가가 한문 성어와 전고를 많이 채용하여 다분히 의고적인 유장함을 느끼게 하나, 이에 담긴 실질은 대체로 관습화된 감회의 수준에 머무른 것이어서 시적 가치를 높이 평가할 만한 작품은 많지 않다.

 

만고강산 유람할 제 삼신산이 어디메뇨, 일봉래 이방장과 삼영주 이 아니냐. 죽장 짚고 풍월 실어 봉래산을 구경하고, 경포 동령의 명월을 구경하고, 청간정 낙산사와 총석정을 구경하고, 단발령을 얼른 넘어 봉래산을 올라서서 천봉만학 부용들은 하늘 위에 솟아 있고, 백절폭포 급한 물은 은하수를 기울인 듯 선경일시가 분명하구나. 때마침 모춘이라, 붉은 꽃 푸른 잎과 나는 나비 우는 새는 춘광춘색을 자랑한다. 봉래산 좋은 경치 지척에 던져 두고 못 본 지가 몇 날인가. 다행이 오늘날에 만고강산을 유람하여 이곳을 당도하니 옛일이 새로워라. 어화 세상 벗님네야, 상전벽해 웃들 마소. 엽진화락 없을손가. 서산에 걸린 해는 양류사로 잡아 매고 동령에 걸린 달은 계수야 머물러라. 한없이 놀고 가자. -만고강산

잡가(雜歌)

잡가란 조선 후기의 시정에서 직업적반직업적 소리꾼들에 의해 가창된 유락적 노래들이다. 음악적 측면에서 본 잡가는 십이가사에 비해 훨씬 통속적이며 일반 민요보다는 선율과 창법이 세련되어 유흥적 화려함을 짙게 띤 가요류로 규정할 수 있다.

잡가는 다양한 악곡으로 가창되었기 때문에 율격 및 전체적 시형의 구속력이 매우 느슨하며, 따라서 일정한 정형을 집약하기 어렵다.

잡가는 시조, 한시의 구절들을 끌어다 쓰기도 하고, 민요, 십이가사, 판소리창 등을 적지 않이 전용하였으나 그 어느 것에도 기울지 않으면서 말 그대로 박리한 흡수력과 형태적 다양성을 보인다.

잡가가 이처럼 다양한 요소들을 흡수하면서 문학적 형태면에서 잡박한 혼합성을 띠게 된 것은 그것이 사계축이나 삼쇄 같은 비교적 하층의 소리꾼들에 의해 시정 놀이판의 여러 청중들을 상대로 한 유락적 가요로 불린 데에 주요 원인이 있지 않은가 한다.

그런 점에서 잡가는 본래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가요 유형이 아니라 대체로 18세기 무렵부터 발달한 대중적 혼합 가요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잡가의 내용은 애정, 삶의 무상함, 취락,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류, 세상살이의 애환, 익살희언(戱言) 등 다채로우나 전체적으로 보아 세속적쾌락주의적 지향이 두드러진다.

수심가, 황계사, 육자배기, 날개타령, 영산가, 유산가, 뒷산타령, 맹꽁이 타령등이 있다.

 

가세 가세 자네 가세 가세 가세 놀너를 가세

를 타고 놀너 가세 지두덩기여라 둥게둥덩지로 놀나를 가세

압집이며 뒤집이라 각위 각집 가인들은 장부 간장 다 녹인다

원 계삼월아 회양도 봉봉 도라들 오소

에남나에 일손니 돈 밧쇼

리별은 초목에 불이로다

 쥬리 뉘 잇슴나

 

가세 가세 네 가세 가세 가세 놀나를 가세

를 타고 놀나를 가세 지두덩기여라 둥게둥덩지로 놀를 가세

나는 쥭네 나는 쥭네 님야 나는 쥭네

나 쥭는 줄 알 양이면 불원천리 련마

동삼원 계월아 회양도 봉동 도라를 오소

에남나에 일손니 돈 밧쇼

박난중 쓰고 남은 쳘퇴 텬항우를 쥬어

치리라 치리라 리별 두 치리라

 

가세 가세 자네 가세 가세 가세 놀나를 가세

를 타고 놀나를 가세 지두덩지여라 둥게둥덩지로 놀나를 가세 -선유가

 

신체시(新體詩)현대시(現代詩)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격변기적 모색 속에서 중래의 전통적 시가 형식으로부터 탈피한 실험적 시 형태로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 꽃두고(1909) 등의 신체시가 출현하였다. 이름이 말해주듯이 신체시는 전통적 율격의 정형을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새로운 시형을 이루고자 한 의식적 노력의 산물이다.

내용상으로 본 신체시는 새로운 시대의 의욕과 낙관적 세계상을 주정적으로 노래한 것이 많아서, 일종의 계몽적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을 질겨 맛노라,

그러나 그의 아리운 태도를 보고 눈이 얼이며

그의 향긔로운 냄새를 맛고 코가 반하야

정신업시 그를 질겨 마짐 아니라,

다만 칼날 갓흔 북풍을 더운 긔운으로써

인정 업난 살기를 깁흔 사람으로써

대신하야 밧구어

가 저린 어름 밋헤 눌니고 피도 어릴 눈구덩에 파무처 잇던

억만 목숨을 건지고 집어내여 다시 살니난

봄바람을 표장함으로

나는 그를 질겨 맛노라.

 

나는 을 질겨 보노라.

그러나 그의 평화 긔운 먹음은 웃난 얼골 홀니며

그의 부귀 기상 나타낸 성한 모양 탐하야

주저 업시 그를 질겨 봄이 아니라.

다만 것모양의 고은 것 매양 실상이 적고

처음 서슬 장한 것 대개 뒤업난 중

오즉 혼자 특별히

약간 영화 구안치도 아니코 허다 마장 격그면서도 굽히지 안코

억만 목숨을 만들고 느려내여 길히 전할 바

씨열매를 보육함으로

나는 그를 질겨 보노라. -꽃두고

 

신체시의 과도기적 모색 이후 1910년대 중엽의 학지광태서문예신보(1918~1919) 등을 통해 실험적 작품들을 보인 현대시는 31운동 직후의 신문학운동기에 그 초기적 윤곽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1910년대의 전사적(前史的) 단계를 거치면서 초기의 윤곽을 형성한 현대시는 31운동 이후의 수년 동안에 나온 창조(1919), 폐허(1920), 장미촌(1921), 백조(1922) 등의 동인지와 개벽(1920 창간), 조선문단(1924 창간) 등의 잡지를 주요 매체로 하여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김억, 황석우, 홍사용, 이상화, 박영희, 박종화 등 이 시기의 주요 시인이 지닌 공통의 주제는 황폐한 세계 안에 고립된 자아의 고통과 번민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음울한 낭만주의는 전통적 사회문화의 급격한 붕괴와 식민지화의 체험이라는 두 요인을 배경으로 하여 생성되고, 당대의 현실 앞에서 스스로의 무력함을 절감한 지식인들의 번민과 더불어 하나의 시대적 전형으로까지 확산되었다.

1924년 이후 신경향파 카프(KAPF) 계열의 문학이 등장하면서 시의 조류는 크게 두 가닥, 즉 개인의 내면적 체험과 심미성을 중시하는 계열과 현실의 모순에 대한 투쟁 정신 및 사회 의식을 중시하는 계열로 나뉘었다.

아울러 1920년대 중엽에는 특정한 사조나 운동에 속하지 않으면서 탁월한 시적 성과를 이룩한 두 인물 김소월과 한용운이 나타났다. 김소월의 시가 님과 자아의 절대적 분열을 상정한 비극적 세계관 위에서 섬세한 시안(詩眼)으로 슬픔의 미학을 추구한 데 비해, 한용운은 불교적 사유와 적극적 현실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세계의 현존하는 분열상을 넘어서는 시적 인식에로 나아갔다.

1930년대 초부터 일제의 탄압에 의해 모든 이념적 사회 운동과 그 표현이 억압됨에 따라 현실 비판적 시의 조류는 침체 또는 간접화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시에서는 개체의 체험과 내면세계에 대한 성찰, 도시적 삶의 점묘(點描), 자연과 생명적인 것에의 관심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시의 언어적심미적 세련이 보다 큰 관심사가 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시문학(1931 창간)을 중심으로 하여 박용철, 김영랑, 신석정 등이 추구한 순수시에의 지향이다. 이들이 생각한 순수시란 일체의 이념적, 사회적 관련으로부터 떠나 섬세한 언어감각과 그윽한 서정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시였다.

한편 1930년대 중엽부터는 모더니즘이라는 범칭으로 포괄되는 일련의 실험적 경향들이 출현하였다. 대체로 서구 현대시의 조류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이미지즘,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주지주의 등이 그것이다. 김광균은 이미지금과의 연관에서 이상은 초현실주의다다이즘과의 연관에서 조명될 만한 시인들이다.

1930년대 후반에는 다시 이들과 대조적인 경향을 지닌 일군의 시인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모더니스트들이 즐겨 다룬 도시적 세계와 메마른 주지적 경향을 거부하고, 삶의 고뇌 혹은 인간과 자연의 근원적 관련에 주목하였다. 그중에서도 전자의 주제를 중시한 서정주함영수유치환 등을 생명파라 하고, 후자의 쪽으로 기울었던 박목월박두진조지훈을 자연파 혹은 청록파라 부른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햇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숫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서정주, 자화상

 

일제 말기의 상황 속에서 어둡고 부패한 시대와 마주선 주체적 삶의 문제를 노래한 시인으로 이육사와 윤동주가 주목된다.